[교육] “김정은 집권 후 北경제 안정세” 이게 우리 고교 교과서
2023.04.13 11:06
“김정은 집권 후 北경제 안정세” 이게 우리 고교 교과서
文정부때 검정 통과한 역사책들
대부분 김정은 집권 미화·왜곡
[김연주. 윤상진, "“김정은 집권 후 北경제 안정세” 이게 우리 고교 교과서," 조선일보, 2023. 4. 10, A6쪽.]
최근 북한의 극심한 경제난과 인권침해 실상이 드러나고 있지만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들은 김정은 집권 후 “북한 경제가 안정세”라며 김정은 업적을 사실상 미화하거나 북한 현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으로 9일 확인됐다. 세계 최악인 북 인권 실상을 제대로 다룬 교과서는 거의 없었다. 지금 남북 현실은 김정은이 ‘남한 핵 공격’을 대놓고 협박하는 상황인데도 교과서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의 정상회담 사진을 실으며 남북 관계가 개선됐다고 서술하고 있다.
본지가 고교 검정(檢定) 한국사 교과서 9종을 살펴본 결과, 대다수 교과서는 ‘남북 화해와 동아시아 평화 노력’이란 단원에서 북한 문제를 다뤘다. 김정은이 ‘3대 세습’을 했지만 북한 경제는 좋아졌고 북 사회에 긍정적 변화가 있다는 식의 내용이 많다. “김정은 등장 이후 북한은 기업 활동의 자율성을 더욱 확대했다” “일부 산업 설비를 자체 생산할 정도로 경제가 안정세를 보였다” “경제 특구를 확대하여 개방 정책을 펼쳤다” “남북은 종전 선언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것이다.
현행 교과서는 근현대사(19세기 중반 이후) 분량이 기존 50%에서 75% 정도까지 늘어났다. 교과서 좌편향 문제를 연구해온 정경희 국민의힘 의원은 “교과서에는 역사적 평가가 끝난 내용을 실어야지, 몇 년 전 일어난 일까지 싣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정권 홍보를 위해 왜곡한 교과서 내용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새 교과서는 현재 집필 중이며 내년 검정 심사를 받을 예정이다. 교육 현장에는 내후년부터 사용된다.
현행 고교 교과서 9종은 2019년 11월 검정 심사를 완료했고 2020년부터 학생들이 사용하고 있다. 2018년 김정은은 한미를 상대로 ‘평화 쇼’를 벌였지만 2019년 2월 하노이 미북 회담이 깨진 이후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19년 여름부터 문 전 대통령을 향해 “삶은 소 대가리” “겁먹은 개” 등 막말을 쏟아냈다. 그런데 당시 정부는 그해 11월까지 교과서 검정을 하면서도 북을 미화, 왜곡한 내용을 손보지 않았다. 특히 남북 관계는 변동이 심할 수밖에 없는데도 문 정부 시절 1년 남짓한 상황을 보편적 사실인 양 기술한 것이다.
현행 교과서 중 천재교육은 “김정은 등장 이후 북한은 기업 활동의 자율성을 더욱 확대하고 개인의 경제활동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였다”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외 무역 규모가 확대되고 일부 산업 설비를 자체 생산할 정도로 경제가 안정세를 보였다”고 기술했다. 그런데 김정은은 조금이라도 체제가 이완할 조짐을 보이면 통제를 바로 강화했다. 2017년 핵과 탄도미사일 폭주를 하면서 북한 경제는 고꾸라졌고 최근엔 황해도 지역에선 아사자가 속출하는 지경이다.
금성출판사는 “2013년에는 경제 건설에 주력하겠다는 정책 방향을 분명히 밝혔다”며 “이에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 다양한 건설 사업이 진행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업소와 공장 운영에서도 자율성이 확대되어 기업 경영 능력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고, 수익을 많이 낸 기업들의 노동자 임금이 크게 오르는 경우도 나타났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김정은의 보여 주기식 건설 공사 때문에 자원 배분이 왜곡돼 북 경제는 더 곪아갔다는 지적이 많다.
미래엔은 “최근에는 신의주 등에 시장경제 체제를 부분 수용한 경제 특구를 확대하여 개방 정책을 펼치는 등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평양의 고층 건물 사진을 보여줬다. 김정은은 제대로 된 개방 정책을 펼친 적이 없고, 지금 북에 정상적인 경제 특구는 단 하나도 없다.
비상교육은 ‘최근 북한의 경제 성장의 모습’이란 코너를 마련해 2016년까지 북한의 경제성장률 그래프를 보여주며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 경제는 2015년을 제외하고 전반적으로 흑자 성장세를 보였다”고 했다. 이어 “김정은 체제 이후 시장의 활성화와 무연탄, 수산물, 의류 위탁 가공 수출 확대를 기반으로 대외 무역의 증가 등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적었다. 2018년 한국은행 발표 자료로 북 경제성장률을 소개하면서 성장률이 추락한 2017년 수치는 빼고 2016년까지만 소개했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김정은이 집권 후 핵 개발에 모든 자원을 쏟아붓는 바람에 인민 경제는 더욱 피폐해지고 부촌인 개성까지도 아사자가 나올 정도로 경제난이 심각한 상황”이라며 “북한 경제가 나아졌다는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거짓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교과서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 침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9종 중 6종은 북 인권 문제는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거론한 교과서도 “식량난과 인권 탄압으로 북한 주민들이 탈북하는 사례가 늘어났다”(리베르)는 식으로 간단히 서술했다.
현대사의 북한 문제에서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것이 ‘핵 폭주’다. 민족을 절멸시킬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런데도 교과서는 김정은의 핵 도발을 얼버무리고 있다. “김정은이 집권 초 핵 개발을 강행하면서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었으나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등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김정은은 2017년까지 수소폭탄을 포함한 4차례의 핵실험을 했다. 미국 본토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도 여러 차례 쐈다. 교과서는 북핵 위험은 설명하지 않고 2018년 김정은의 ‘비핵화 사기극’을 중요한 변화인 것처럼 서술한 것이다. 교과서 검정이 진행되던 2019년에는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게 드러났는데도 한 교과서는 “북한이 비핵화를 전제로 남북, 미북 회담에 적극 나선다”고 적었다.
특히 남북 관계는 변화가 심할 수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교과서가 문재인 정부 들어 남북 관계가 개선됐다고 서술했다. “(2018년) 4월 27일 제3차 남북 정상회담을 열고 4·27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문에 완전한 비핵화 및 적대 행위 금지가 명시되어 있어 남북은 종전 선언에 한 걸음 더 다가갔고, 철도 연결과 평화 수역 설정을 명시하여 공동 번영의 발판을 마련하였다”(리베르)는 식이다. 9종 가운데 7종은 2018년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의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사진을 실었고, 1종은 같은 해 백두산에서 두 정상이 부부 동반으로 찍은 사진을 게재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김정은 정권의 핵·미사일 위협은 ‘레드 라인(금지선)’을 이미 넘었다. 고등학생들이 거꾸로 된 역사, 가짜 역사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