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우크라이나·남한·이란·튀르키예는 유라시아 체스판의 핵심 국가들”
2023.05.04 16:31
“우크라이나·남한·이란·튀르키예는 유라시아 체스판의 핵심 국가들”
[김명섭, "“우크라이나·남한·이란·튀르키예는 유라시아 체스판의 핵심 국가들”," 조선일보, 2023. 4. 27, A32쪽.]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거리가 멀수록 관심은 작아진다. 1950년 코리아의 6·25전쟁 당시도 비슷했다. 많은 세계인은 브라질 월드컵에 더 열중하고 있었다. 무관심해도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1950년대 코리아에서의 열전(熱戰)은 제3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될 뻔도 했지만 국제적 노력으로 정전에 성공하면서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열전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도 유사한 노력이 필요하다.
전쟁의 배후에는 지정학적 관념의 충돌이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놓치면 유라시아의 대국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인접한 캅카스 지역 국가들(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스탄 계열 국가들, 그리고 몽골 등에 대한 통제력이 연쇄적으로 약화될 것을 두려워한다.
1997년 『지정학의 기초: 러시아의 지정학적 미래』를 출간했던 두긴(А. Дугин, 1962~)이나 푸틴 대통령에게 유라시아는 단순히 ‘유럽+아시아’라는 자연지리적 범주가 아니다. 그것은 다소 신비로운 역사해석에 기초한 인문지리적 정체성(identity)이다. 정체성은 이익(interest)보다 상위의 개념으로 외교적으로 양보하기 어렵고, 전쟁도 불사하게 만든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동조동근(同祖同根)의 역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키예프’가 없는 러시아 역사는 상상하기 어렵다. 우크라이나 동부에서는 러시아어로 생활하는 인구도 많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1991년 국민투표에서 92% 이상이 독립을 지지했다. 러시아어 사용자들이 많은 동남부 지역에서도 80% 이상이 독립에 찬성했다. 크리미아반도에서조차 54% 이상의 찬성표가 나왔다. 그것은 유라시아의 반대쪽 코리아에서 1898년 독립협회가 주도했던 만민공동회, 1948년 95% 이상이 자유선거에 참여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했던 역사를 연상시킨다. 독립의 지정학이다.
1991년 러시아의 지도자 옐친은 벨라베자조약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독립을 공인했다. 고르바초프가 유지하고자 했던 소련에 마침표가 찍혔다. 우크라이나에 있던 소련제 핵무기들은 미국, 영국, 러시아가 안전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철거되었다(1994년 부다페스트각서). 소련제 핵무기가 있던 벨라루스와 카자흐스탄도 우크라이나 방식으로 비핵화되었다.
흑해 방면의 군사 요충지 크리미아반도의 러시아 해군은 우크라이나로부터 세바스토폴항을 임대했다. 1945년 얄타회담이 열리기도 했던 크리미아반도(한반도의 약 8분의 1)는 1954년 소련이 우크라이나에 양도했었다. 1654년 우크라이나-러시아 페레야슬라프조약 300주년 기념 선물이었다. 1953년 스탈린이 급사한 후 집권한 우크라이나와 연고가 깊었던 흐루쇼프의 결정이었다.
1991년 이후 우크라이나는 대외적 독립에 성공했지만 대내적 통합에는 실패했다. 친러파 척결을 외치는 배타적 민족주의자들이 성장했다. 러시아의 개입은 오히려 이들의 정치적 기반을 넓혀주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확대는 우크라이나를 분열시킨 또 하나의 원심력이었다. 1949년 체결된 북대서양조약(NAT)은 코리아 6·25전쟁의 충격 속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 발전했다. 1991년 공산권의 바르샤바조약기구(WTO)는 해체되었지만, NATO는 확대되었다.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있던 체코, 폴란드, 헝가리가 1999년 NATO에 가입했다. 2004년에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에 더해서 과거 소련의 일부였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가 가입했다. 2008년 4월 조지아까지 NATO 가입 의사를 밝히자 러시아는 강하게 반발했다. 같은 해 8월 러시아는 조지아 내 친러시아 지역의 독립을 지원하며 러시아-조지아 전쟁을 벌였다.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주적 선택
2013년 11월 우크라이나에서는 유로마이단혁명으로 친러시아 노선의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물러났다. 물론 서방의 개입도 있었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주적 선택이었다. 자유로운 서방에 비해 독재정치가 지속되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인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러시아는 2014년 2월 무력을 동원해서 크리미아반도를 점령했다. 1954년 이전 영토선으로의 회귀였다. 러시아에는 1856년 크리미아반도 전쟁 패배로 인한 아픈 기억도 남아있다. 그러나 역사를 동원한 현상 변경을 용인하면 모든 나라들에는 전쟁 사유가 생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내의 분리주의운동을 지원했다. 우크라이나 동쪽 바다의 이름을 딴 아조프민병대가 분리주의자들과 사투를 벌였다. 공간 쟁탈전은 역사 전쟁을 동반한다. 우크라이나인들은 1930년대 초 스탈린 치하에서 약 300만명이 아사한 홀로도모르(Holodomor)에 대한 기억을 소환했다. 러시아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나치 독일이 우크라이나 민병대를 동원해서 폴란드인들을 학살한 볼린(Volyn)의 기억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지금 폴란드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 러시아는 젤렌스키(V. Zelenskyy, 1978~)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나치주의자라고 공격했다. 젤렌스키는 유태인이고, 그의 증조부와 증조부 형제들이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당한 가족사가 있음에도.
2022년 2월 젤렌스키가 2021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처럼 외국으로 망명했다면 전쟁은 쉽게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젤렌스키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군에 맞섰다. 외국으로 망명했던 포로셴코 전 대통령까지 귀국해서 힘을 합쳤다. 지금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민주와 독립이라는 정치적 명분이 있다.
우크라이나의 현재는 코리아의 과거다
우크라이나의 현재는 코리아의 과거다. 코리아의 과거에는 인접 열강들을 피해 태평양으로 향했던 독립의 역사가 대한제국,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이어져 왔다. 1950년에는 조선민족주의와 공산주의로 무장한 조선인민군이 대한민국을 절멸시키려 했다. 조선인민군에는 중국공산당을 도와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족 부대도 있었다. 처음에는 전복(顚覆)을 선호하던 스탈린은 작전 계획까지 세워주며 전쟁을 후원했다.
한국군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조선인민군을 38선 이북으로 밀어냈다. 더 나아가서 대한민국 헌법이 영토로 규정하고 있던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수복하고자 했다. 당시에는 간도를 포함한 ‘대한제국의 강역(疆域)’에 대한 영토 의식도 강했다. 취임 당시 헌법을 수호하기로 맹세했던 한국 대통령은 ‘통일 없는 정전’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2024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젤렌스키도 유사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K정전 모델을 우크라이나로
2022년 6월 한국 대통령이 NATO 동맹국·파트너국 정상회의에서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는 연대”를 표방한 것은 지정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우크라이나에 인도적 지원이 실행되었고, 인접 국가들은 K무기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글로벌 중추국가’로서의 역할을 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1953년 정전협정과 한미 상호방위조약 위에서 대한민국의 안정과 번영을 가능하게 했던 K정전 모델을 수출해야 한다.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도 없는 K정전 모델이 무슨 수출 가치가 있냐고 힐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코리아의 정전이 우크라이나에서의 열전보다 낫다. 다수의 러시아 국민도 정전을 원한다. 공간 쟁탈전에 더 이상 젊은이들을 밀어 넣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미래를 결정하게 하자. 코리아의 미래도 우크라이나의 현재와 무관하지 않다. 개인을 모래시계 속의 모래알로만 여기던 제국주의 시대의 지정학에서 벗어나 씨알 같은 개인의 비판적 지정학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이유다.
지정학의 몰락과 부활
지정학적 사유는 지리적 공간과 정치권력의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이러한 지정학적 사유는 춘추전국시대나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랜 역사를 지닌 지정학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몰락한 것은 지정학이 전쟁에 오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정치지리학자 라첼(F. Ratzel)이 고안한 생존공간(Lebensraum) 개념을 발전시킨 하우스호퍼(K. Haushofer)는 나치 독일의 팽창정책을 옹호했다.
하우스호퍼는 1909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 육군을 연구했고, 일제 치하의 조선도 방문했다. 그의 연구 성과는 귀국 이후 『대일본』 『태평양지정학』 등으로 출간되었다. 일본 제국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에 이바지한 고마키 사네시게(小牧実繁), 이모토 노부유키(飯本信之) 등 일본 지정학자들은 하우스호퍼와 공명했다. 동유럽이 독일의 생존 공간이듯이 동아시아를 일본 제국의 생존 공간이라고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이들의 지정학도 몰락했다. 1946년 하우스호퍼와 그의 유태인 부인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정학은 미국이 주도하게 된 지식 플랫폼에서 기피되었다. 미국 정부와 대학의 지원을 받는 지역연구는 발전했지만, 지정학이라는 용어는 사라지는 듯했다.
지정학을 부활시킨 학자들은 역설적으로 지정학의 오용으로 피해를 당했던 사람들이었다. 나치 독일의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유태인 가족 출신의 키신저(H. Kissinger, 1923~)는 유럽의 지정학을 미국의 대외정책에 적용했다. 나치 독일의 피해를 입었던 프랑스에서 1970년대부터 지정학을 선도했던 라코스트(Y. Lacoste, 1929~)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 출신이었다. 소련의 지정학적 압박을 피해 캐나다로 망명했던 폴란드 가족 출신의 브레진스키(Z. Brzezinski, 1928~2017)는 소련을 지정학적으로 다루었다. 특히 브레진스키는 과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없이는 유라시아의 제국이 될 수 없다”며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남한, 터키, 이란은 유라시아 체스판 위의 지정학적 추축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비교정치학자로 출발해 문명 충돌이라는 지정학적 사유를 발전시킨 헌팅턴(S. Huntington, 1927~2008)은 전 세계 인문사회계 학자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었다. 헌팅턴은 세계를 양분했던 냉전시대가 끝난 이후 언어와 종교를 기준으로 구별되는 문명권에 의해 세계가 구획된다고 보았다. 헌팅턴은 우크라이나가 문명적 단층선에 의해 분열된 국가라고 분석했다. 그의 지정학적 통찰은 문명 충돌점으로서의 코리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