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의 정체성? 무슨 정체성?
2016.09.22 10:34
[박정훈, “야당의 정체성? 무슨 정체성?,” 조선일보, 2016. 9. 2, A34.]
더불어민주당이 법인세 인상을 추진하면서 꼼수를 썼다. 세금을 올린다면서도 '인상'이라 안 하고 '정상화'라고 우긴 것이다. MB 정부 때 세율을 2%포인트 내린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더민주는 MB 정부의 법인세 인하가 대기업만 혜택 준 나쁜 감세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원상 복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민주가 한사코 숨기는 것이 있다. MB 정부에 앞서 노무현 정부도 법인세를 내렸다는 사실이다. 2004년 노 대통령은 '기업 유치 경쟁에 필요하다'는 논리로 세율을 2%포인트 인하했다. 당시 국회에서 세법안을 처리한 게 열린우리당이었다. 그 몇년 전엔 김대중 정부도 법인세를 1%포인트 낮추었다. 그래 놓고도 시침 뚝 떼고 MB 정부만 나쁜 양 떠든다. 그야말로 위선이다.
새로 등장한 추미애 대표가 더민주의 정체성(正體性) 논란에 불을 댕겼다. 그가 대표 선거 때 전략 상품으로 들고 나온 것이 정체성 이슈였다. 그는 김종인 위원장의 중도 실용 노선을 겨냥했다. 김 위원장의 우(右)클릭이 당 정체성과 맞지 않고 야당 전통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고 공격했다.
추 대표가 말하는 더민주의 정체성이 무언지 대략 그림은 그려진다. 사드(THAAD) 반대처럼 한․미 동맹의 색깔을 빼고 대북 유화 노선을 펴는 것이다, 경제 쪽에선 분배를 우선하고 증세와 대기업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일 것이다. 추 대표는 강한 야당의 선명성을 되살리자고 한다. 핸들을 왼쪽으로 꺾자는 얘기다.
어떤 노선을 택할지는 추 대표 자유겠지만 알아둘 것이 있다. 그가 집착하는 야당의 정체성이 그렇게 견고한 개념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 더민주는 추 대표가 말하는 정체성과 어긋난 길을 종종 걸었다, 특히 더민주 집권 10년의 경제정책은 새누리당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만큼 성장 친화적이고 친기업적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다. 경제 분야 동맹을 뜻하는 한․미 FTA는 노무현 대통령이 결단한 것이었다. 2006년 초 노 대통령은 "개방과 경쟁을 통해 세계 일류로 가겠다"며 협상 계획을 밝혔다. 개방․경쟁이며 일류 같은 개념부터 좌파 진영이 질색할 만한 것들이었다. 한․미 FTA는 극단적으로 강력한 우파 어젠다였지만 노 대통령은 정권을 걸고 추진했다.
반대 진영이 대미(對美) 굴종이라며 저항해도 밀리지 않았다. 시위가 격화되자 노무현 정부는 '폭력 사태 엄단'으로 강경하게 맞섰다. 한명숙 총리는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해 엄단하겠다"고까지 했다. 지금 야당이 그렇게도 비난하는 박근혜 정부의 대처 방식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는 '정체성'을 버린 정권이 되는가.
흔히 좌파 정부는 반(反)대기업․반재벌 체질이라고 한다. 그러나 재계의 기억하는 실상은 좀 다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재벌 손보기 때문에 고생한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대기업이 원하는 성장 드라이브 정책들이 나와 재계가 반색하곤 했다.
비정규직 문제의 출발점인 파견근로제가 도입된 것은 김대중 정부 때였다. 외환 위기 속에서 김대중 정부는 정리해고제 같은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밀어붙였다. 대표적인 재벌 규제인 출자총액제한제를 폐지하고 사내 유보 과세도 없앴다. 좌파 진영이 신자유주의 정부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노무현 정부 때는 재계의 굵직한 숙원 사업이 이뤄졌다. 수도권 공장 신증설을 허용해 파주 LCD단지가 세워졌다. 세계 최고 경쟁력을 자랑하는 LG필립스의 LCD 공장도 이때 지어진 것이다. 재계가 원했던 규제총량제도 도입됐다. 노무현 정부 5년간 규제 건수는 2700여건이 줄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뛰어넘는 감소 폭이었다.
재벌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삼성이 만든 보고서가 노무현 정부의 통치 프로그램에 활용되기도 했다. 대기업 진출을 막는 중소기업 고유 업종 제도를 폐지한 것도 이때다. 이 제도는 5년 뒤 이명박 정부 때 이름만 바꿔 부활했다. 좌파 정부가 없앤 대기업 규제를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이명박 정부가 되살린 셈이다. 양극화 심화라는 시대 상황 탓이겠지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추 대표는 당의 정체성을 무슨 종교적 신념처럼 말하나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야당이 걸어온 길을 보면 생각만큼 정체성에 집착하지 않았다. 특히 경제 분야에선 내놓고 실용과 친성장 노선을 취했다. 하고 싶어서 했다기보다는 국가 경영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경제를 활성화하고 파이를 키우지 않으면 나라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강한 야당을 외치는 추 대표를 보면 나중에 어떻게 수습하려는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는 사람들이 많다. 정체성도, 선명성도 좋으나 그것이 신앙이 되는 순간 야당은 영원히 집권하지 못한다. 지금 더민주를 보면 마치 정권을 받지 않겠다고 시위라도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