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 살해 계획 3일전 해방으로 무산
2006.06.21 11:41
[김필재, “기독교인 살해 계획 3일전 해방으로 무산,” 미래한국, 2004. 8. 14, 14쪽.]
일제시대 기독인들은 상하이 임정[임시정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임정의 모체였던 ‘독립 임시사무소’를 운영한 단체는 ‘신한청년단’이었다. 신한청년단은 1918년 여름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정당 형태로 결성됐다.
신한청년단은 결성 당시 백범 김구를 포함해 종교를 밝힌 사람들은 모두 기독인이었다. 신한청년단은 독립청원서를 작성,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에 주력했다. 또 단원들은 3·1운동 이전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기독인들의 활약은 상하이 한인교회를 통해서도 두드러졌다. 당시 이 교회와 관계를 맺고 있던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조소앙, 신익희 등의 기독교인들은 임정의 요직을 맡았으며 훗날 대한민국 건국의 주체가 됐다. 일제는 이 때문에 상하이한인교회를 두고 “예수교를 이용, 독립운동을 선전하고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며 경계했다.
신한청년단 외에 조선독립기성회와 대한신민단 등의 단체에서도 기독인들은 주요 역할을 맡아 활동했다. 조선독립기성회의 경우 상하이 임정의 탄생과 함께 대한국민회로 개명했다. 회장 구춘선, 부회장 서상용 등 회원들의 대부분이 기독인이었다. 이 단체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과 연합해 봉오동 전투에 참여했으며, 북로군정서와 연합해 어랑촌 전투에서 일제와 싸웠다. 대한신민단은 1919년 3월 북간도 왕청현에서 조직됐다. 이 단체 역시 단장 김규면을 비롯한 대부분의 단원들이 기독인이었다. 대한신민단도 독립군을 편성, 중국 삼둔자에서 전투를 벌였다.
한편 한국 교회는 독립운동과 별도로 사회의 도덕성 회복에 초점을 맞춰 활동했다. 사이토(제2·5대 조선총독)부임 이후 제출된 ‘재한선교사 연합협의회’의 개혁 건의서에 따르면, 한국 교회는 유곽 폐지와 아편의 제조·판매금지, 주류 판매의 제한, 미성년자의 금연령 실시, 소년의 노동 제한, 입옥자의 주일노동 반대 등을 요구했다. 당시 일제는 도읍마다 유곽을 세우고, 아편을 공개적으로 경작, 판매했으며, 술 담배를 통한 한국인의 도덕적 몰락을 방조했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후 내선일체를 강화하며 기독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에 평양 산 정현 교회의 주기철 목사를 비롯해 평북의 이기선, 경남의 한상동, 주남선, 평남의 이주원 전도사, 전남 순천 애양원 교회의 손양원 전도사, 여성으로는 안이숙, 조수옥, 재건파의 최덕지 전도사 등이 신사 참배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신사참배 반대운동에는 장로교뿐 아니라 감리교에서도 목사·평신도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관여하거나 참가했다. 이로 인해 투옥된 기독인들은 1945년에 이르기까지 2,000여명에 달하고 200여 개의 교회가 폐쇄됐으며 이들 중 50여 명이 순교했다.
미국과의 전쟁(태평양 전쟁)을 개시한 1941년 12월 이후 일제는 한국 교회 말살정책의 최종단계로 나아갔다. 주요 교회 지도자의 검속·선교사 추방·선교사 재산 동결령과 같은 사건이 줄을 이었다. 특히 일제는 새문안 교회에 대해 언더우드 목사의 기념비를 철거토록 지시하기도 했다. 특히 1944년 7월 한국 내의 모든 교단들을 강제 통합시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결성케 했으며, 이를 공공히 하기 위해 1945년 8월 18일을 기점으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살해할 계획을 모의했으나 미국의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로 인해 일제가 패망(1945. 8. 15)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일제시대 한국 교회의 애국 활동과 관련해 민경배 서울장신대 총장은 “한국 교회는 3․1운동 직후 한국 사회의 도덕성 회복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면서 군국주의와 일제의 몰 역사성에 도전, 저항했다"며 '이 같은 활동으로 한국 교회는 일제시대 사회를 이끌어가는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설명했다.
일제시대 기독인들은 상하이 임정[임시정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임정의 모체였던 ‘독립 임시사무소’를 운영한 단체는 ‘신한청년단’이었다. 신한청년단은 1918년 여름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정당 형태로 결성됐다.
신한청년단은 결성 당시 백범 김구를 포함해 종교를 밝힌 사람들은 모두 기독인이었다. 신한청년단은 독립청원서를 작성,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에 주력했다. 또 단원들은 3·1운동 이전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기독인들의 활약은 상하이 한인교회를 통해서도 두드러졌다. 당시 이 교회와 관계를 맺고 있던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조소앙, 신익희 등의 기독교인들은 임정의 요직을 맡았으며 훗날 대한민국 건국의 주체가 됐다. 일제는 이 때문에 상하이한인교회를 두고 “예수교를 이용, 독립운동을 선전하고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며 경계했다.
신한청년단 외에 조선독립기성회와 대한신민단 등의 단체에서도 기독인들은 주요 역할을 맡아 활동했다. 조선독립기성회의 경우 상하이 임정의 탄생과 함께 대한국민회로 개명했다. 회장 구춘선, 부회장 서상용 등 회원들의 대부분이 기독인이었다. 이 단체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과 연합해 봉오동 전투에 참여했으며, 북로군정서와 연합해 어랑촌 전투에서 일제와 싸웠다. 대한신민단은 1919년 3월 북간도 왕청현에서 조직됐다. 이 단체 역시 단장 김규면을 비롯한 대부분의 단원들이 기독인이었다. 대한신민단도 독립군을 편성, 중국 삼둔자에서 전투를 벌였다.
한편 한국 교회는 독립운동과 별도로 사회의 도덕성 회복에 초점을 맞춰 활동했다. 사이토(제2·5대 조선총독)부임 이후 제출된 ‘재한선교사 연합협의회’의 개혁 건의서에 따르면, 한국 교회는 유곽 폐지와 아편의 제조·판매금지, 주류 판매의 제한, 미성년자의 금연령 실시, 소년의 노동 제한, 입옥자의 주일노동 반대 등을 요구했다. 당시 일제는 도읍마다 유곽을 세우고, 아편을 공개적으로 경작, 판매했으며, 술 담배를 통한 한국인의 도덕적 몰락을 방조했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후 내선일체를 강화하며 기독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에 평양 산 정현 교회의 주기철 목사를 비롯해 평북의 이기선, 경남의 한상동, 주남선, 평남의 이주원 전도사, 전남 순천 애양원 교회의 손양원 전도사, 여성으로는 안이숙, 조수옥, 재건파의 최덕지 전도사 등이 신사 참배 반대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신사참배 반대운동에는 장로교뿐 아니라 감리교에서도 목사·평신도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관여하거나 참가했다. 이로 인해 투옥된 기독인들은 1945년에 이르기까지 2,000여명에 달하고 200여 개의 교회가 폐쇄됐으며 이들 중 50여 명이 순교했다.
미국과의 전쟁(태평양 전쟁)을 개시한 1941년 12월 이후 일제는 한국 교회 말살정책의 최종단계로 나아갔다. 주요 교회 지도자의 검속·선교사 추방·선교사 재산 동결령과 같은 사건이 줄을 이었다. 특히 일제는 새문안 교회에 대해 언더우드 목사의 기념비를 철거토록 지시하기도 했다. 특히 1944년 7월 한국 내의 모든 교단들을 강제 통합시켜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결성케 했으며, 이를 공공히 하기 위해 1945년 8월 18일을 기점으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살해할 계획을 모의했으나 미국의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로 인해 일제가 패망(1945. 8. 15)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일제시대 한국 교회의 애국 활동과 관련해 민경배 서울장신대 총장은 “한국 교회는 3․1운동 직후 한국 사회의 도덕성 회복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면서 군국주의와 일제의 몰 역사성에 도전, 저항했다"며 '이 같은 활동으로 한국 교회는 일제시대 사회를 이끌어가는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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