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과 같은 현대사의 비극은 한국만 겪지 않았다. 어리석은 인간은 전쟁, 학살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에겐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만큼의 현명함은 있다. 세계 현대사는 그런 노력의 연속이었다. 물론 진실과 단죄가 중요하다. 가해자는 반성과 사죄 요구를 벗어날 수 없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피해자 역시 용서와 화해를 요구받는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대로 '화해는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와 부담을 짊어지겠다는 의지가 수반될 때 가능한' 일이다. 철저한 가해자 단죄가 전제되지 않을 때도 피해자가 화해를 요구받는 일이 있었다. 5·18보다 훨씬 큰 비극을 다룬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 르완다의 가차차 법정은 가해자의 단죄보다 피해자의 양보를 더 필요로 했다. 미래로 전진하려면 과거의 사슬을 풀 수밖에 없었다.
5·18, 세월호 문제를 돌이킬 때 '내가 유족이라면' 하고 생각한다. 자신이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라며 반성하지 않는 저런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듯하다. 하지만 정치는 달라야 한다. 피해자 입장에 가까운 쪽일수록 단죄보다 용서와 화해에 중심을 둬야 한다. 때로는 피해자를 설득해야 한다. 미래로 전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한국 정치는 늘 반대 로 간다. 상처를 들추고 건드린다. 그게 상식과 정의라고 생각한다.
문 대통령은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겠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5·18은 충분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헌법은 국민의 총의(總意)를 담은 근본 규범이다. 분노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 진실과 단죄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말할 때 대통령은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