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反美)의 이유
2005.06.07 15:21
[자유주의 연대 운영위원이며 전 고려대 총학생회장인 최홍재 씨의 글; 조선일보 2005년 3월 12일(A26쪽).]
80년대는 꿈을 이루었다. ‘반미의 무풍지대 한반도’에 ‘반미의 열풍’이 불게 하자던 시대의 호소는 이제 상식처럼 되었다. 최소한 미국 행정부를 삐딱하게 쳐다보아야 ‘진보나 합리’의 언저리에 접근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니 ‘과거의 투자’가 빛을 발하고 있는 셈이다. 마르크스주의가 학생운동의 주류를 형성했던 1980년대 중반을 넘어, 중후반 NL(민족해방)주사파가 학생운동의 주류를 확고히 하자, 반미는 운동의 근본적 목표로 상승하였다. 미국은 19세기부터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려고 작정한 나라로 ‘격상’하였다. 분단의 책임자이자 분단 유지의 원흉으로 미국은 각인되어 갔다.
한국이 잘 살게 된 것도 미국이 쇼윈도를 만들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피눈물 나는 아버지 세대들의 노고는 지주에 놀아나는 마름의 굴종처럼 폄하되고 무시되었다. ‘내가 박정희라도 미국을 등에 업고 인권탄압하면 산업화할 수 있겠다’는 조소는 이와 같은 폄하 속에서 생성된 것이다.
이 시각을 연장해서 보면 북한 동포들의 고통도 다 미국 때문이다. 그들이 굶어죽은 것도 미국 때문이고, 그들의 천부인권이 처참하게 유린되는 것도 미국 때문이다. 김정일 정권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도 미국 때문이다.
미국이 대북지원을 하면 ‘독(毒) 바른 사과’이거나 ‘트로이 목마’이고, 대북지원을 하지 않으면 ‘경제봉쇄’다. 인권개선을 요구하지 않으면 ‘독재정권 지원’이고, 그 개선을 요구하면 ‘신성한 국가주권의 침해’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이, 모든 논리는 반미로 귀착된다. 도대체 미국이 어떤 잘못을 했기에 ‘도덕적인 386’에게 이토록 뭇매를 맞는가? ‘절대반미’의 이유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황금기인 페리클레스 시대에 도편추방법이 있었다. 매우 잘난 사람의 이름을 깨진 도자기 조각(도편《片)에 적어내게 한다. 이 중 가장 다수에게 거명된 사람을 도시에서 추방했다. 매우 잘난 사람은 독재를 하거나 전제군주가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람에게는 강자를 동경하는 모습과 두려워하는 모습, 양면이 있다. 이런 모습은 강자에게 줄을 서려는 행동과 강자를 고립시키려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유일패권국 미국에 대해 도편추방의 심리가 작용하는 것은 틀림없다. 이런 반미는 어찌 보면 건강하다. 초강력 패권국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고 그가 가진 힘을 최대한 인류다수의 이익에 맞게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을 진정한 친구로 만들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도덕적인 386’에게 반미는 도편추방의 심리로 설명할 수 없는 간곡한 것이다. 그 비밀의 열쇠는 1980년 광주에 있다. 386은 70년대 말 유신시기에 잉태되어 80년 5월 광주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광주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도 나오고 김일성 주체사상과도 조우하였다. 80년 5월에 침묵한 사람이나 세력, 나라는 청산의 대상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광주에서 자국민을 빼내고, 항공모함을 출동시켜 휴전선을 응시했던 미국에, 386은 ‘독재의 조력자’, ‘분단의 유지자’라는 평가를 안겼다. 급기야 마르크스주의나 김일성 주체사상을 도입하여 미국을 ‘만악의 근원’으로 승격시켰다. 신군부를 제어할 힘이나 권한이 미국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근거를 가지고 별도로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신군부와 맞서지 않았다는 것이 ‘절대반미’의 이유인 것은 매우 분명하다. 이른바 ‘수구꼴통’도 그래서 절대반미와 동일하다.
유신이나 80년 신군부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폭압정권 김정일에 맞서 민주와 자유를 찾기 위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억압이 있는 곳에 어찌 저항이 없겠는가.’
80년 ‘오월의 눈’으로 살펴보자! 지금 김정일 정권의 협력자는 누구인가. 김정일의 학살과 인권유린에 항의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 나서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별의별 이야기로 김정일 정권의 야만통치를 변호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살기 위해, 가족을 위해 탈출한 사람들을 두고 ‘기획탈북’ 운운하는 사람들이 또한 누구인가.
인권말살과 생명파괴에의 동참이 80년 5월 미국의 행동과 어찌 비교가 되겠는가! 더 이상 인권과 민주주의를 거론하지 말라. 80년대를 떠받친 무명의 386들을 모욕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