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2001년까지 4년간 2만여명 처형
2005.08.07 16:52
[김범수, “북(北) 2001년까지 4년간 2만여 명 처형,” 미래한국, 2005. 4. 23, 1쪽.]
북한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하여 수만 명 규모의 대대적인 내부 숙청을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심화조(深化調)’로 불렸던 당시 숙청작업은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돼 2001년 말까지 공식적으로만 총 2만여 명의 당간부 및 핵심요원들을 고문 또는 총살하거나 정치범수용소에 보냈던 사건으로 평양 지도급사회에서는 ‘원자탄’에 비견되는 큰 공포와 충격을 줬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사실은 최근 보위부 등 북한의 정보기구 및 중앙당에 근무하던 요원들과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4년 만에 처음 밝혀졌다.
이들의 진술에 의하면 ‘심화조’는 90년대 중후반 북한경제가 붕괴하고 기아 사태가 속출하여 북한체제에 대한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자 김정일이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회안전부(경찰)를 앞세워 진행한 것이다.
심화조의 시발점은 1997년 8월 노동당 농업담당비서 서관희가 간첩혐의로 평양 통일거리 관문동에서 공개처형을 당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북한식량공급 실패와 이에 따른 대량아사의 책임을 서관희와 그를 배후 조종했다는 미국과 남한에 덮어 씌움으로써 주민들의 대외 적대감 극대화 및 권력강화를 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 북한 보위부 요원에 따르면 1997년 평양 관문동에서 서 비서의 공개처형을 지켜본 주민들은 농업비서를 통해 북한의 대량아사를 유발시켰다는 미국과 남한정권에 대해 격렬한 적개심을 내비쳤다.
북한정권은 또한 혁명열사릉에 안장돼 있던 전 농업담당비서 김만금에 대해 농업실패와 대외 내통 등의 혐의를 씌우고 그의 시체를 꺼내 총질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서윤석 평양시당 책임비서, 문성술 중앙당 본부당 책임비서 등이 같은 기간 간첩 또는 반당종파행위 혐의를 받고 처형되거나 사라졌다. 문성술은 김정일의 세포비서고문으로 김정일의 보고를 받을 수 있는 최고위급 인사로 김일성의 측근으로 분류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일은 심화조를 진행하는 사회안전부에 특권을 부여하고 “나부터 주민등록 사업을 하라”며 권한을 강화했다고 한다. 주민등록상 한국전쟁 기간 중에 한 달이라도 직무가 공백이 있는 경우나 그런 사람과 연관을 맺고 있는 이들의 경우 간첩혐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로동당 전 요원의 증언에 따르면 “주민등록 사업은 나이든 김일성 측근들을 제거할 구실이었다. 당시 분위기는 사업장에서 누가 지각만 해도 심화조에 붙들려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사회안전부가 1990년대 말부터 2001년까지 심화조의 일환으로 처형한 인원은 중앙당간부 2,500여 명을 포함 근 3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당 안보강연회 공식 자료에는 그 숫자가 2만여 명으로 나와 있다고 전해진다.
사회안전부는 당시 각 지역의 시, 당조직은 물론 분주소(파출소)까지 조사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분주소가 통째로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심화조에 대해 김정일에 대한 칭송으로 나타났다. “악질들을 장군님이 청산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안전부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하고 심화조가 극심한 부작용과 사회적 공포와 불만을 증대시키자 김정일은 이번엔 사회안전부에 화살을 돌렸다.
사회안전부 정치국장 최문덕을 간첩혐의로 숙청하는 등 안전원 6,000여 명을 처형했다. 사회안전부는 이후 아예 그 이름까지 인민보안성으로 바꾸었다.
김정일은 2001년 말 중앙당안보강연회 공식자료를 통해 심화조의 일환으로 2만여 명이나 처형시킨 사회안전부의 죄행을 비판했다. 또한 전 농업담당비서 김만금과 서관희를 무죄로 복권하고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가족들을 석방함으로써 대대적 숙청에 따른 불만을 누구러뜨리려 했다는 분석이다.
북한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하여 수만 명 규모의 대대적인 내부 숙청을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심화조(深化調)’로 불렸던 당시 숙청작업은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돼 2001년 말까지 공식적으로만 총 2만여 명의 당간부 및 핵심요원들을 고문 또는 총살하거나 정치범수용소에 보냈던 사건으로 평양 지도급사회에서는 ‘원자탄’에 비견되는 큰 공포와 충격을 줬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사실은 최근 보위부 등 북한의 정보기구 및 중앙당에 근무하던 요원들과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4년 만에 처음 밝혀졌다.
이들의 진술에 의하면 ‘심화조’는 90년대 중후반 북한경제가 붕괴하고 기아 사태가 속출하여 북한체제에 대한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자 김정일이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회안전부(경찰)를 앞세워 진행한 것이다.
심화조의 시발점은 1997년 8월 노동당 농업담당비서 서관희가 간첩혐의로 평양 통일거리 관문동에서 공개처형을 당한 것이었다.
김정일은 북한식량공급 실패와 이에 따른 대량아사의 책임을 서관희와 그를 배후 조종했다는 미국과 남한에 덮어 씌움으로써 주민들의 대외 적대감 극대화 및 권력강화를 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 북한 보위부 요원에 따르면 1997년 평양 관문동에서 서 비서의 공개처형을 지켜본 주민들은 농업비서를 통해 북한의 대량아사를 유발시켰다는 미국과 남한정권에 대해 격렬한 적개심을 내비쳤다.
북한정권은 또한 혁명열사릉에 안장돼 있던 전 농업담당비서 김만금에 대해 농업실패와 대외 내통 등의 혐의를 씌우고 그의 시체를 꺼내 총질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서윤석 평양시당 책임비서, 문성술 중앙당 본부당 책임비서 등이 같은 기간 간첩 또는 반당종파행위 혐의를 받고 처형되거나 사라졌다. 문성술은 김정일의 세포비서고문으로 김정일의 보고를 받을 수 있는 최고위급 인사로 김일성의 측근으로 분류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일은 심화조를 진행하는 사회안전부에 특권을 부여하고 “나부터 주민등록 사업을 하라”며 권한을 강화했다고 한다. 주민등록상 한국전쟁 기간 중에 한 달이라도 직무가 공백이 있는 경우나 그런 사람과 연관을 맺고 있는 이들의 경우 간첩혐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로동당 전 요원의 증언에 따르면 “주민등록 사업은 나이든 김일성 측근들을 제거할 구실이었다. 당시 분위기는 사업장에서 누가 지각만 해도 심화조에 붙들려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사회안전부가 1990년대 말부터 2001년까지 심화조의 일환으로 처형한 인원은 중앙당간부 2,500여 명을 포함 근 3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당 안보강연회 공식 자료에는 그 숫자가 2만여 명으로 나와 있다고 전해진다.
사회안전부는 당시 각 지역의 시, 당조직은 물론 분주소(파출소)까지 조사했으며 지역에 따라서는 분주소가 통째로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심화조에 대해 김정일에 대한 칭송으로 나타났다. “악질들을 장군님이 청산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안전부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하고 심화조가 극심한 부작용과 사회적 공포와 불만을 증대시키자 김정일은 이번엔 사회안전부에 화살을 돌렸다.
사회안전부 정치국장 최문덕을 간첩혐의로 숙청하는 등 안전원 6,000여 명을 처형했다. 사회안전부는 이후 아예 그 이름까지 인민보안성으로 바꾸었다.
김정일은 2001년 말 중앙당안보강연회 공식자료를 통해 심화조의 일환으로 2만여 명이나 처형시킨 사회안전부의 죄행을 비판했다. 또한 전 농업담당비서 김만금과 서관희를 무죄로 복권하고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가족들을 석방함으로써 대대적 숙청에 따른 불만을 누구러뜨리려 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