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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보장으로 '한국 수준 번영'이 어떻게 가능한가



[선우 정, "체제 보장으로 '한국 수준 번영'이 어떻게 가능한가," 조선일보, 2018. 5. 23, A34쪽; 사회부장.]

                                

사실처럼 굳어진 북한에 대한 두 가지 전설이 있다. 해방 후 친일파를 철저히 제거했다는 것, 역사 청산을 바탕으로 1970년대 초까지 한국을 앞서는 경제 발전을 이뤘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한국에서 북 정권 옹호론이 지금껏 생명을 유지하는 토대를 제공했다. 북한에 '역사적 정통성'과 '번영 가능성'이 있으니 적대 정책을 멈추고 지원하면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자생력이 있다는 논리다.

북한의 숙청사(史)는 지독하다. 국내 민족주의자, 자생적 공산주의자는 물론 친중파와 친소파까지 싹쓸이했다. 그런데 친일파 숙청은 자취가 희미하다. 북한은 한국처럼 친일 청산을 위한 특별법을 만든 적도 없고 누구를 얼마나 단죄했는지 기록도 없다. 대신 한국 좌파 기준으로 '명백한 친일 무용가' 최승희가 월북해 20년 이상 승승장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1956년 전원회의 사건 때 반대파가 김일성을 향해 '토굴 속 인민이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는 경제 현실'과 함께 '친일파 중용'을 비판했다는 사실도 역사에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 땅에서 군림하던 일본인 기술자를 해방 후 독립투사 이상으로 우대했다는 증언도 기록돼 있다.

'친일 청산' 전설은 '과거의 영광' 전설과 동전의 양면이다. 해방 후 한국과 달리 북한엔 일제의 거대한 산업 시설이 존재했다. 일제가 북한 지역을 군사기지화한 결과였지만 그 이전에 노구치 시타가우(野口遵)처럼 일본 산업계 거물들의 대륙 확장 야심도 한몫했다. 북 정권 옹호론자들은 이 자산이 6·25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됐다고 말한다. 북한이 맨바닥에서 스스로 일어났다고 미화하기 위한 거짓이다. 전쟁 직후 북한의 공업 생산은 전쟁 전의 60~70%였다. 그마저 공산 진영의 전폭적 지원으로 몇 년 후 회복됐다. 세계 탈(脫)식민지 가운데 1950년대 공업적 생산 구조를 가진 지역은 북한이 유일했다. 일본이 남긴 산업 설비와 전후 국제 지원 때문이다. 북 정권의 업적이라면 이를 위해 친일파를 중용하고 일본인을 우대한 '유연성' 정도일 것이다.

1970년대 초까지 북한 경제가 한국을 앞섰다는 주장은 대부분 북 정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지표에 의존한다. 1950년대부터 스스로 '지상 낙원'이라고 선전한 정권이다. 재일 한국인 9만명이 선전을 믿고 북송선을 탔다. 그들이 얼마나 빨리 실상을 알았는지는 일본에 남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북한은 '역사적 정통성'은 물론 '번영 가능성'도 증명한 일이 없다. 일제의 산업 시설과 대중 동원으로 버티다가 파탄 난 경제에 불과하다. 1920년대 흥남에 들어선 세계적 화학 콤비나트가 지금 어떤 몰골인지를 보면 실체를 알 수 있다.

북 정권 옹호론자들은 북한 경제의 파탄 원인을 밖으로 돌린다. 서방의 적대 정책, 압박과 봉쇄 탓이라는 것이다. 역시 거짓이다. 북한 경제의 몰락은 오히려 1971년 서방의 대규모 대북 투자 시점과 일치한다. 북한은 외자(外資) 운용 실패로 3년 만에 상환을 중단하면서 안으로 쪼그라들었다. 실패에 대한 좌절감을 세상에 대한 적대 행위로 표현했다. 북핵(北核)이 그 정점이다. 북한을 압박하고 봉쇄한 것은 서방이 아니라 북한 자신이다.

북한 경제의 실패 원인은 내부 모순에 있다. 북한 내부 모순의 뿌리이자 정점에 '유일 체제'가 있다는 것을 대부분 학자들은 인정한다. 쉽게 말해 유일 체제는 수령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인민이 여기에 복종하는 체제를 말한다. 시스템도, 법도 수령에게 종속된다. 계약서 수백 장 위에 수령 한마디가 있다. "하늘이 빨갛다"고 수령이 말하면 북한 하늘은 빨간 것이다. 유일 체제는 공산 독재와 다르다. 개발 독재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 체제를 만나는 순간 수탈 대가로 얻은 일제의 자산, 공산 진영의 원조, 서방의 호의적 투자는 사막에 흩뿌려진 물처럼 증발해 버렸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면 체제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한국 수준의 번영'까지 약속했다. 이런 모순이 없다. 체제를 보장하면 어떤 번영도 불가능하다. 번영하려면 체제를 바꿔야 한다. 궁극적으론 체제 변화 없이 완전한 비핵화도 달성할 수 없다. 북한 체제를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 핵이기 때문이다. 이 돌고 도는 모순을 알면서 말하지 않는다 . 판이 깨질까 다들 두려워 한다.

북한 동포를 위해선 100조원이든, 1000조원이든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등이 휘어져도 좋다. 하지만 이 노력이 북한의 번영을 이루고 그 번영이 훗날 평화와 통일로 이어진다는 눈곱만 한 희망이라도 있어야 한다. 희망이 없는 지원은 '인질의 몸값'에 불과하다. 그러느니 그냥 북핵을 지고 살길을 도모하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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