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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묘사하는 역사교과서



[강규형,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묘사하는 역사교과서," 미래한국, 2018. 3. 28, 46-50쪽;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세미나]

지난 3월 16일 전희경 자유한국당 의원실 주최로 열린 ‘교육에 드리운 사회주의 그림자’라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을 전재한다. <편집자 주>


역사 교육, 특히 자기 나라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기억의 공유’를 통해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얻기 위함이다. 그래서 국사 교육은 차세대 예비 시민들을 가르치는 교육적 전범으로 기능한다. 앞선 세대의 성취와 가치관을 후세대에 전달하여 공통 기억을 만들어냄으로써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공동체 구성원으로 길러 내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맹목적인 자화자찬이나 ‘신화 만들기’와 구별되며, 앞 세대가 걸어간 길의 공과와 명암을 객관적으로 살펴 차세대가 더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할 수단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과서는 학교 교과 교육의 기본이 되는 텍스트로 가장 정제된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사교과서 문제는 학생들이 과연 현재의 ‘역사교과서’를 믿고 공부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가 의문이다. 현재 검정제에서는 다양한 역사인식이 있음을 인정하고 가장 타당한 통설을 받아들일 줄 아는 성숙한 민주 시민을 배양하기보다는 오로지 한가지 역사 해석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편향된 역사인식을 가진 한국인을 기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러한 교과서 서술의 차이는 남북한에 대한 서술, 역대 정부에 대한 평가 등에서 역사적 관점에 따라 더 극명하게 두드러진다. 다양한 해석 중 교과서에 하나만을 기술해 학생들로 하여금 그것만 알게 해서도 안 되며, 교과서 집필진에 의해 또는 수업을 담당하는 교사에 의해 해석된 역사가 학생에게 주입되어서도 안 된다.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북한과 관련한 서술도 분명히 기술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많은 한국사 교과서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적 서술과 대한민국의 성취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하면서 거꾸로 북한 체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북한 체제에 대해 우호적으로 서술하기도 한다. 


떤 교과서의 북한 체제와 주체사상에 대한 서술은 거의 미화 수준이다. 이러한 서술은 ‘통일 지상주의’적 관점과 ‘내재적’ 관점에서 북한을 바라보려 하고, 반면에 민주주의와 천부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무시하려는 자세에 그 원인이 있다. 따라서 공산 왕정체제적인 부자 세습과 학정, 그리고 북한의 도발에 대한 언급은 아예 생략하거나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남북한 양 체제에 엄청난 격차가 생긴 이유가 있을진대 교과서는 그것을 전혀 설명해 주지 못한다.


예를 들어 또한, 중·고 역사교과서 총 17종 중 천안함 피격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도발 사건 모두가 기술되지 않은 교과서는 5종이나 되며, 기술된 12종 가운데 천안함 피격 사건은 한국사 교과서 4종에만 서술되어 있어 학생 간 인식 편차가 심하게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현재의 검인정 과정은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검정위원들은 기존 주류 수정주의 사관에 사로잡혀 있는 국사학계의 한계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교수·교사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특히 교사들이 더 경직된 경우가 많았다.


고등학교 교육 현장에서 ‘한국근현대사교과서’를 2003년부터 채택할 때 가장 심각한 편향성을 가진 금성출판사교과서가 50~60%의 압도적 채택률을 보인 이유가 그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사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왜곡된 한국현대사, 특히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폄하하는 역사관을 불식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들 중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유일한 국가이기에,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해방 후 식민지체제를 탈피하고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민족주의교육이 강조됐다. 이런 노력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결실을 이뤄 자긍심을 갖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부작용도 나타났다. 국가와 민족을 혼동하는 폐쇄적 민족주의가 뿌리박는 부작용이 생겨났다. 한국의 국사 교육은 역사 인식의 주체를 국민 혹은 국가가 아니라 민족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민중적 관점을 강조했다. 그 결과는 한편으론 편협하고 폐쇄적인 복고적(復古的) 민족주의, 다른 한편으론 마오쩌둥(毛澤東)주의에 영향을 받은 좌파적 민족주의로 귀결됐다.


좌파민족주의에 빠진 역사 해석


또 다른 특징은 내재적(內在的) 발전론에 입각해서 근대를 열강의 침략과 그것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원적(二元的)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있는 점이다. 또한 한국의 근·현대는 좋건 싫건 간에 국제관계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는데도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과 서술이 무시되고 있다. 즉 폐쇄적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일국사(一國史)적 관점에 빠져버려 한국사를 세계사적 시야에서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리고 현대사 서술에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적 서술, 대한민국의 성취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북한체제에 대한 우호적 서술도 나타났다. 국민들 사이에서 역사에 대한 인식의 공유를 통해 사회 통합이 이뤄지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회 갈등은 계속될 개연성이 높다. 한국사 교육은 민족, 민중, 통일지상주의라는 협소하고 폐쇄적인 사관(史觀)에서 탈피해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국제적 관점을 강화해야 한다.


각론으로 들어가서 대한민국 수립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대한민국이란 이름이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3·1 운동과 그 여파로 생겨난 임시정부에서였다. 신석우 선생의 제의로 대한민국이란 명칭이 채택됐다. 그 이후 선각자들의 노력은 바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대한민국이라는 주권을 가진 근대국민국가 설립을 위한 분투였다.


따라서 임시정부 수립의 역사적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이후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연합국 특히 미국에 의해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귀결되고 나서 1945년 8월 15일 감격적인 해방이 찾아왔다. 해방은 찾아왔지만 그것으로 국가가 세워지고 독립한 것은 아니었다. 해방 이후 3년간의 대단히 힘든 국내외 난관을 뚫고 대한민국이 수립됐다.


1948년에 역사적인 5·10선거가 유엔 감시 아래 치러졌다. 이 선거는 당시 세계적인 기준으로 보더라도 매우 선진적인 것이었다. 한반도 5000년 역사에서 가장 자유로운, 그리고 국민이 주인이 된 첫 번째 선거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제헌의회에서 헌법이 제정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8월15일 대한민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은 유엔 총회에서 승인


이렇게 탄생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승인을 얻었기에 국제적인 ‘출생신고’를 완료했다. 국제 승인을 받은 한반도 내의 유일한 합법정부였다. 주권을 가진 진정한 독립을 이룬 것이다. 국가의 3대 요소인 주권, 영토, 국민을 다 충족시킨 건국이었다.


그래서 이듬해인 1949년 8월 15일은 제1회 독립기념일이었고, 그날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1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했다.


직후 제헌의회는 독립기념일을 다른 기념일의 명칭 통일하기 위해 광복절(節)로 바꾸었고 이에 따라 1950년 8월 15일에 제2회 광복절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이 명칭에 대해 훗날 혼선이 생겨나 광복이란 것이 1945년 해방과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을 기념하는 날로 혼용됐었다.


그러다가 점점 광복절은 1945년 해방을 기념하는 날로 정리가 됐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8·15 광복절에 1945년 해방과 1948년 대한민국 수립(건국)을 공히 기념해야 한다. 실제로 1998년 8월 15일에는 ‘건국50주년’을 2008년 8월 15일에 ‘건국60주년’을 기념했다.


1919년은 정신적 건국이자 대한민국이 수태된 날이었고, 그 이후는 고통을 수반한 임신의 기간이었으며,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었고, 1948년은 합법적이고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이란 갓난아이가 탄생한 실질적 건국의 해였다.


궁극적으론 한반도가 공산전체주의 통일이 아닌 자유통일 되는 날 이런 광복과 대한민국의 의미는 완결성을 띠게 될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식민통치를 벗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 미군정과 소군정이 3년 동안 시행되었다.


그 직후 대한민국은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을 받았고, 세계 각국과 수교를 맺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8년 12월 12일 파리 샤이요 궁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서 공산권을 포함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압도적 찬성을 얻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받았다(찬성 48, 반대 6, 기권 1, 결석 3). 이 결의문은 아울러 한반도에 이미 존재하던 ‘두 체제’ 중에 대한민국만이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점도 상당히 선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and that 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

일부 국사학계에서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고 훗날 역사적으로 해석돼야 할 중대한 사안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적 승인을 받은 한반도 내의 유일한 합법정부였다. 달리 표현하면 베스트팔렌 체제에서 국가주권을 가진 진정한 독립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사학계의 한심한 오류는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의 의도적인 오역을 맹종한 결과였다.


이선민 조선일보 기자는 여기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사학자들은 국사교과서 논란이 있을 때마다 같은 주장을 되풀이 했다. 2011년 9월에는 한 지방 국립대 교수가 그런 주장을 폈고, 한국사 검정교과서 좌편향 논란이 불거졌던 2013년 12월에는 서울대 교수가 같은 주장을 담은 칼럼을 일간지에 기고했다.


한 사립대 교수는 자신이 집필한 검정 교과서에 그렇게 썼다가 교육부로부터 수정명령을 받자 이를 거부하고 방송 인터뷰에서 거듭 같은 주장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정도의 영어 실력과 초보적인 논리적 사고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해석될 수 있는 영어 문장을 놓고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동이 계속 되는 것일까?


그들이 원문을 보지 않은 것인가. 봤다면 해석할 실력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진실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학자들이 진실을 끝까지 외면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느 경우든 이런 사람들에게 역사교육을 맡겨놓아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라고 준엄하게 질타했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가 1948년을 건국 또는 대한민국 수립이라 표현한 적이 없다는 일각의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물론 이승만은 1919년의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을 여러 번 했었다. 그래서 제헌헌법 전문(前文)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 국민은 기미 3ㆍ1운동으로 대한 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라고 썼다. 제헌헌법 전문은 1987년 헌법과 달리 3·1 운동만 언급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와 제헌의회는 1948년 8월 15일을 독립기념일로 명명했고 거기에 따라 1949년 8월 15일 ‘제1회 독립기념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오늘은 민국(民國) 건설 제1회 기념일”이라 언급했다.


그런데 그해 6월에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 회부됐고, 4대 국경일인 3·1절, 헌법공표기념일, 독립기념일, 개천절 중에 헌법공포기념일을 ‘제헌절’로 바꾸고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바꾸는 수정안이 9월에 통과되면서 독립기념일이 광복절로 바뀌었다.

4대 국경일을 절(節)로 통일하자는 취지였다. 따라서 1950년 8월 15일에는 제2회 광복절 기념식을 거행했고, 1951년 8월 15일에는 제3회 광복절 기념식이 거행됐다.


1948년 건국이 임시정부 부정 아니다


대한민국 수립이란 문구가 3·1운동, 임시정부, 독립운동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라며 무차별적으로 비방하는 일부 학계와 언론의 행동은 더 해괴하다.


일단 대한민국에서 이런 것들의 소중한 의미를 부정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설’을 주장한다고 해서 이러한 가치를 무시한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1948년 대한민국 수립(또는 빈도수는 적지만 대한민국 건국)이란 단어는 이미 예전부터 교과서와 여러 책들에서 계속 써왔던 용어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교과서에도 물론 사용된 용어이다.


일각에서 우려하는 대한민국수립이란 표현은 건국절 논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국의 대표적인 한국사 개설서인 고(故)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신론’(일조각)도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의 성립’이라 서술하고 있고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의 ‘다시 찾는 우리역사’(경세원)도 ‘대한민국 수립’으로 돼 있다.


1948년 설을 가장 격하게 부정하는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도 자신이 편찬한 ‘한국사연표’ 290쪽에 그날을 ‘대한민국 수립 선포’라고 명확히 표기했다. 교과서를 보자면 1차와 2차 교육과정에서도 이 단어는 압도적으로 많이 채택됐었다.


3차부터 6차까지의 국정교과서에서도,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검인정교과서 6종 중 4종에서, 2011년부터 시행된 개정 한국사교과서에서도 6종 중 3종, 현행 교과서 중에서도 비상교육출판사 출판본에 ‘대한민국의 수립’이라 서술됐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교과서들과 책들은 ‘임정을 부정하고 친일세력을 옹호’한 사람들인가? 집단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인가 아니면 지적인 자기기만에 빠진 것인가. 일부 역사학계와 정치권의 자가당착적 주장과 여기에 앵무새처럼 맹목적으로 동조한 일부 방송과 신문들은 깊이 반성하고 명확한 답변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대한민국 수립’이란 단어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지적인 진실성을 결여한 사람들이라 얘기할 밖에 없다. 가령 1919년에 진정한 건국이 됐다면 이후 펼쳐진 독립운동(혹은 광복운동, 민족해방운동 등)의 존재와 의미는 무엇인가. 더욱이 미래의 건국을 대비하여 1941년 임시정부에서 건국강령을 준비한 것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임시정부가 1941년 11월 28일 새 민주국가의 건설, 즉 진정한 독립과 건국을 준비하기 위한 ‘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발표한 것도 온전한 국가를 세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 건국강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정치이념으로 독립과 새 나라의 건국을 위한 청사진(靑寫眞)을 밝힌 중요 문건이다.


참고로 동아일보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17일부터 19일까지 3회에 걸쳐 ‘건국강령’의 내용과 해설기사를 실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4년 전에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공포(制定公布)하였는데 그 강령의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라고 하며 1면에 1941년의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연재했다. 또한 최근 국사학계는 소위 재야사학자들의 무리한 고대사(古代史) 해석에 대해 ‘사이비 역사학’이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과도한 민족주의에 빠져’ 드러난 문헌적·고고학적 증거를 무시하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일침을 가한 것은 일리 있는 비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사 분야에선 국사학계 자신들이 ‘지나친 민족지상주의와 좌파수정주의에 빠져서’ 재야사학자들의 상고사 해석보다 더 심한 수준의 왜곡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왜곡의 정도와 기간이 꽤 심했기에 역사교과서 문제는 앞으로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큰 이슈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오늘은 세계사와 한국현대사를 잇는 중요한 고리인 소련(러시아)체제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우리 역사교과서들은 대부분 소련을 2차 세계대전의 최대 피해자이자 연합군 승리의 최대 공헌자로서 평가하고, 동아시아 한반도에 있어서도 해방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해석은 거의 성역처럼 다뤄지고 있다.


소련은 2차 대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이고 연합국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대체로 맞다. 그러나 그것은 히틀러가 불가침조약을 어기고 소련을 공격한 이후의 일이다. 교과서들이 생략하고 있는 앞부분을 보면 전혀 다른 얘기가 전개된다. 공산체제의 확산에 몰두한 소련과 그 수장인 스탈린은 2차 대전 직전에 나치독일과 희대의 악마적 거래를 성사시켰다.


그게 바로 1939년 8월에 맺어진 독소불가침조약, 즉 리벤트로프-몰로토프조약이었다. 문제는 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양국이 몰래 맺은 비밀의정서였다.


소련은 해방군이 아니라 전범(戰犯)


독일이 폴란드의 서쪽을 갖는 대신 소련이 폴란드 동쪽을 갈라먹고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아 지역 등을 추가로 차지하는 경악할 내용이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대전은 시작됐지만, 교과서가 철저히 무시하는 부분은 소련도 곧이어 폴란드를 침공했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유럽의 공산당들은 소련의 지시를 받고 나치 독일을 돕는 행동을 시작했다. 소련은 2차 대전 발발의 철저한 공범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폴란드 동부를 점령한 소련은 아예 폴란드 자립의 싹을 없애기 위해 폴란드의 지식인·장교 등의 사회지도급인사 2만 2000명을 러시아로 끌고 가 카틴(Katyn) 숲에서 모조리 학살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만행 중 하나를 저질렀다.


소련은 이 같은 사실을 부인하다가 스탈린이 비밀경찰에게 이 학살을 지시한 비밀문서가 1989년 공개되고, 1990년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이 용기 있게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 만천하에 진실이 공개됐다.


동아시아는 어땠을까. 독소불가침조약의 혜택을 누리던 소련은 일본과도 비슷한 타협을 이뤄냈다. 1941년 4월 체결된 소련-일본중립조약으로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전선에서 마음껏 날뛰도록 방조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소련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면서 소련은 어쩔 수 없이 연합국과 공조를 해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 그러나 아·태 전선에선 진주만 습격(1941년 12월 7일) 이후 미국 등 다른 연합국들이 일본과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도 혼자서 일본과의 밀월을 즐겼다. 일본에게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수출하면서 이득까지 챙겼다.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탄 투하(1945년 8월 6일)를 한 직후 승패가 결정 난 이틀 후에야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8월 8일 대일 참전을 선언하고 다음날 군사작전에 돌입했다. 그리고 한반도로 진주한 후에 소련 군복에 대위계급장을 단 김일성과 그 일파를 장래의 하수인으로 쓰려는 목적으로 데리고 왔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교과서들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전혀 혹은 거의 언급하지 않은 채 소련=2차 대전의 최대 공헌자, 소련군=해방군이란 낡은 프레임에 갇혀서 엄청난 허구를 학생들에게 가르쳐 왔다.


동구공산권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되고 나서 많은 새로운 문서들과 사실들이 공개되고 러시아도 이런 사실들을 인정하면서 현대사 해석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사학계는 극도로 폐쇄적인 인식에 사로잡혀 이런 성과들을 거의 반영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낡은 해석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한국사를 위시한 역사교과서들이 갖고 있는 여러 심각한 문제점 중 하나일 뿐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과연 현대사 분야의 국사학계와 고대사 분야의 재야사학자들 중 누가 더 역사를 더 왜곡하고 있는 ‘사이비 역사학’인가? 국사학계가 결코 덜하지 않은 듯하다.


교과서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 정치권과 정치인들은 이런 문제들부터 알고 행동하는 것이 기본적인 도리가 아닐까 싶다. 



= 강규형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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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한국사 檢定 현장에서 겪은 황당 표결 348
25 ‘검은 神話’가 먹칠한 국사교과서 그냥 둘 수 없다 323
24 교과서 국정화, 민중사관의 카르텔을 깨는 첫걸음이 되어야 356
23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과 좌경화 사례 401
22 국사교과서 전쟁 352
21 바른 역사관이 필요하다 227
20 민중사학자들에게 휘둘리는 國史 검정교과서 259
19 역사 교과서만 문제인가 714
18 이런 歷史 교과서로 건전한 대한민국 국민 기를 수 있겠나 681
17 '이석기'는 배우일 뿐, 감독은 '역사 교과서'다 652
16 반역교과서가 된 국어 국사 교과서 국정으로 전환하라 824
15 남침 유도설 등 수정주의 시각, 교과서엔 여전 801
14 남로당式 史觀, 아직도 중학생들 머릿속에 집어넣다니 654
13 현대史를 '총칼 없는 백년 전쟁'으로 몰아가는 좌파 663
12 일부 국사학자의 왜곡된 역사 인식 673
11 역사교과서 고쳐야 931
10 고등학교 현대사 특강에 임하는 우리의 입장 972
9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 문제 1377
8 필자들이 수정 거부한 '금성 교과서' 법대로 처리하라 934
7 좌편향 교과서 기승 부릴 때 역사학계는 왜 잠잤나 1021
6 교과서 개정은 국가의 원상회복 899
5 왜곡된 역사 교과서 퇴출 운동을 973
4 교육부 편수팀을 교체하라 922
3 신의주 반공 학생의거 1135
2 국정교과서 왜곡 심해질 전망 954
1 ‘편향된 현대史’ 우리 교과서 바로잡자 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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