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역사에 한국민은 '전략적 바보'로 기록될까," 조선일보, 2018. 5. 31, A30쪽.]
'김정은이 정말 핵을 버릴 것이냐'는 데 대해 미국 분위기는 많이 다른 모양이다. NBC방송은 'CIA가 5월 초 북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낮다는 보고서를 냈다'고 보도했다. CIA는 미·북 정상회담을 주도한 곳인데도 이런 보고서를 냈다. NBC에 따르면 보고서를 읽은 관료는 "북한 비핵화가 되지 않을 것이란 건 누구나 알고 있다"고 했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 미국 북핵 문제 전문가 30명에게 '협상을 통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했더니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30명 정도에게 물으면 한두 명 정도는 이견이 나올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과거 북한과 협상했던 힐 전 미 6자회담 대표는 김정은이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포기)에 합의할 가능성에 '맥주 한 잔 값도 걸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자주 김정일 처지를 이해하는 편에 섰기 때문에 '김정힐'로 불렸던 사람인데도 이렇다. 한마디로 이들은 '김정은이 핵을 버릴 것이라고 믿는다면 바보'라는 것이다.
김정은은 대북 제재로 1~2년 안에 숨통이 막힐 지경이 돼 핵 협상에 나왔다. 하지만 원래 스케줄이 2017년까지 핵 무력 완성, 2018년 평화 국면 전환이기도 했다. 겉으로 핵을 폐기하는 척하고 실제로는 핵을 보유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북이 핵폭탄(핵물질)을 몇 개나 어디에 갖고 있는지 전모는 김정은만 알고 있다. 미국 CIA와 미 국방부의 추정치가 다를 정도로 미국도 모른다. 20~100개 정도로 추정할 뿐이다. 핵물질 한 개는 야구공만 하고 북에는 땅굴이 1만개에 달한다. 미 CIA는 북핵 은닉 장소를 추적해왔을 테지만 북이 신고하지 않은 핵을 한 개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게 놀라운 일이다. 북핵 검증·사찰도 점차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김정은이 싱가포르에서 핵폭탄 10~20개 정도를 폐기하겠다고 하고 적당한 핵 사찰도 수용하겠다고 하면 트럼프는 노벨상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정부는 '평화가 왔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문재인, 트럼프 대통령도 속으로는 '북 비핵화'를 믿지 않을 것 같다. '북한 어딘가에 핵폭탄이 숨겨져 있을 것'이란 추측은 '합리적 의심'이다. '합리적 의심'이기 때문에 한·미의 머리 위에 항상 떠 있는 구름이 된다. '북에 숨겨진 핵폭탄이 있다'는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북은 NCND(확인도 부인도 않는)로 나올 것이다. 국제사회는 시간이 흐르며 북을 이스라엘과 같은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취급하게 된다. 이것이 김정은이 추구하는 목표라면 상당히 현실적이고 성공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민은 바보가 된다. 그런데 때로는 바보가 이기는 경우가 있다. 북한 땅 전역에서 국제사회 CVID 팀이 체계적으로 활동하게 되면 그 자체로 커다란 억지 효과가 있다. 북이 사실상 핵보유국이 될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대놓고 '서울 핵폭발' 위협은 하지 못한다. 관계자 한 분은 이렇게 말했다. "북이 속이겠다고 작정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 다만 한동안 도발은 하지 못한다. 그 기간에 북 정권이 어느 정도 개혁·개방해 폭력성·위험성이 줄어들기를 바란다. 북에 국제 자본이 들어가면 실제 그런 효과가 생겨날 것이다. 결국 북이 무너질 수도 있다. 누가 알겠나." 그렇게 되면 한국민은 전투에서는 져도 전쟁에서는 이기는 '전략적 바보'가 될 수 있다.
물론 최악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대북 제재가 해제되고, 주한미군이 축소·철수·변경되고, 이 흐름을 되돌릴 수 없게 됐을 때 '북에 핵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공개될 수 있다. 북이 지금과 같은 폭력 집단 자세로 한국을 깔고 앉으려 나오면 한국민은 진짜 바보가 되고 만다.
누구나 기적을 바라지만 어느 날 북핵이 싹 없어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북핵 급류는 어느 굽이를 돌고 있다. 이 굽이 다음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고비에서 시간과 역사는 결국엔 노예제 스탈린 왕조가 아니라 자유와 인권의 편일 것으로 믿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