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 원인은 공산주의의 ‘악마성’ 때문
2005.11.12 16:37
「김필재, “北韓人權 원인은 공산주의의 ‘惡魔性’ 때문,” 미래한국, 2005. 9. 10, 5쪽; 김필재, ‘자유를 지키는 사람들의 모임' 대표.」
북한인권문제의 원인은 인간의 증오심(憎惡心)을 부추겨 파괴와 살육을 선동하는 공산주의의 악마성에 기인한다. 20세기 빚어진 숱한 ‘학살'의 사례들은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스탈린은 공산화과정에서 4,500만 명 이상을 죽였다. 1937년과 1938년 사이에는 매월 약 4만 명 이상이 처형되기도 했다. 학살자의 명단을 기록한 문건만 383권의 책으로 엮어져 있을 정도이다.
공산당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6년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 1936년에서 1938년 사이 10월 혁명 이전 공산당 입당자의 90%를 죽였고, 그 후 입당한 사람은 50%를 죽였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생전에 ‘만능의 천재''빛나는 태양''삶의 지주''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 찬양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 부주교로부터 '우리의 아버지(Our Father)'로 불리기도 했다. 스탈린은 곳곳에 자신의 흉상․동상․초상을 건립해 개인숭배를 강요했다.
스탈린은 4,500만 명 학살, 모택동은 4,300만 명 굶겨 죽여
모택동이 1958년 시작한 ‘대약진운동'은 중국을 철기(鐵器)시대에서 석기(石器)시대로 퇴화시켰다.
大약진운동은 이듬해 비약적 생산증가 대신 大기근을 불러왔을 뿐이다. 그 결과 1959년 굶어죽은 사람의 수는 4,300만 명에서 3,000만 명. 6억 국민을 대상으로 한 모택동의 실험은 6%의 인구를 희생하면서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대약진운동 이후 모택동은 1965년 또 다른 혁명을 꾸몄다. 9살에서 18살에 이르는 어린 학생들, 소위 ‘홍위병(紅衛兵)'을 동원한 '문화대혁명'이었다. 모택동은 홍위병에게 사구(四舊), 즉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습, 낡은 습관'을 타파하라고 지시했다. 중국 전역에서 학생들이 사구(四舊)를 타파한다며 파괴와 폭행, 살인을 일삼았다.
홍위병들은 옛 지주의 자식이거나 금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되는 자, 이웃이 허위로 흑색분자로 고발한 자 등 죄 없는 마을사람들을 자본주의체제 부활을 노리는 중죄인으로 분류해 가차 없이 사형에 처했다. 76년 9월 모택동이 죽을 때까지 문화혁명의 광기는 계속됐고 이 과정에서 약 1억의 중국인이 모진 고초를 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베트남 수용소에서 150만 명 죽어 월맹은 공산화통일 이후 월남의 지식인·공무원·군인·종교인·부유층 그리고 월남정부에 협조한 사람들을 재교육시켰다. 전국 각처에 ‘재교육(再敎育)수용소'가 설치돼 탄압과 차별, 학대와 폭정이 자행됐다.
수용소 방침 자체가 체형(體刑) 및 학대(虐待)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돼 있었고, 수용소장의 재량으로 급식의 양을 결정했다. 면회가 일체 금지됐고, 편지도 1년 또는 2년에 한번 보낼 수 있었다. 의료혜택이 전무했기 때문에 말라리아 등 열병과 뱀·전갈의 독충과 영양실조는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즉결처분된 사람들을 포함해 수용소에서 죽어나간 사람은 30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로 인해 발생한 보트-피플(Boat People)로 불리는 베트남난민들은 1976년부터 1992년 말까지 총 79만 2,893명에 이르렀다.
캄보디아 킬링필드 200만 학살, 300만 난민
1975~1978년까지 캄보디아에서는 공산혁명 결과 200만 명 넘는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3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캄보디아 대학살의 주동자인 폴 포트(본명 ‘살로트 안사르․1925~1998)의 크메르루주 정권은 공산주의, 민족주의를 축으로 자본주의나 외세에 연계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다.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 공무원, 교수, 의사, 약사 등 전문직 종사자와 중류층 이상의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 대상이었다.
6·25사변 때처럼 손바닥에 못이 배기지 않은 사람들은 무조건 부르주아로 몰아 본인과 가족까지 학살했다. 크메르루주는 총알을 아끼기 위해 구덩이에 생매장시키고 우물에 처넣기도 했다. 심지어 일자무식 농민이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오해를 받고 죽임을 당했으며, 국제경기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운동선수 2천 명이 학살되기도 했다. 1만 명으로 추산되는 캄보디아 내 기독교인의 90%가 처형당했다.
북한인권문제의 원인은 인간의 증오심(憎惡心)을 부추겨 파괴와 살육을 선동하는 공산주의의 악마성에 기인한다. 20세기 빚어진 숱한 ‘학살'의 사례들은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스탈린은 공산화과정에서 4,500만 명 이상을 죽였다. 1937년과 1938년 사이에는 매월 약 4만 명 이상이 처형되기도 했다. 학살자의 명단을 기록한 문건만 383권의 책으로 엮어져 있을 정도이다.
공산당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6년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 1936년에서 1938년 사이 10월 혁명 이전 공산당 입당자의 90%를 죽였고, 그 후 입당한 사람은 50%를 죽였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생전에 ‘만능의 천재''빛나는 태양''삶의 지주''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 찬양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 부주교로부터 '우리의 아버지(Our Father)'로 불리기도 했다. 스탈린은 곳곳에 자신의 흉상․동상․초상을 건립해 개인숭배를 강요했다.
스탈린은 4,500만 명 학살, 모택동은 4,300만 명 굶겨 죽여
모택동이 1958년 시작한 ‘대약진운동'은 중국을 철기(鐵器)시대에서 석기(石器)시대로 퇴화시켰다.
大약진운동은 이듬해 비약적 생산증가 대신 大기근을 불러왔을 뿐이다. 그 결과 1959년 굶어죽은 사람의 수는 4,300만 명에서 3,000만 명. 6억 국민을 대상으로 한 모택동의 실험은 6%의 인구를 희생하면서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대약진운동 이후 모택동은 1965년 또 다른 혁명을 꾸몄다. 9살에서 18살에 이르는 어린 학생들, 소위 ‘홍위병(紅衛兵)'을 동원한 '문화대혁명'이었다. 모택동은 홍위병에게 사구(四舊), 즉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습, 낡은 습관'을 타파하라고 지시했다. 중국 전역에서 학생들이 사구(四舊)를 타파한다며 파괴와 폭행, 살인을 일삼았다.
홍위병들은 옛 지주의 자식이거나 금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되는 자, 이웃이 허위로 흑색분자로 고발한 자 등 죄 없는 마을사람들을 자본주의체제 부활을 노리는 중죄인으로 분류해 가차 없이 사형에 처했다. 76년 9월 모택동이 죽을 때까지 문화혁명의 광기는 계속됐고 이 과정에서 약 1억의 중국인이 모진 고초를 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베트남 수용소에서 150만 명 죽어 월맹은 공산화통일 이후 월남의 지식인·공무원·군인·종교인·부유층 그리고 월남정부에 협조한 사람들을 재교육시켰다. 전국 각처에 ‘재교육(再敎育)수용소'가 설치돼 탄압과 차별, 학대와 폭정이 자행됐다.
수용소 방침 자체가 체형(體刑) 및 학대(虐待)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돼 있었고, 수용소장의 재량으로 급식의 양을 결정했다. 면회가 일체 금지됐고, 편지도 1년 또는 2년에 한번 보낼 수 있었다. 의료혜택이 전무했기 때문에 말라리아 등 열병과 뱀·전갈의 독충과 영양실조는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즉결처분된 사람들을 포함해 수용소에서 죽어나간 사람은 30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로 인해 발생한 보트-피플(Boat People)로 불리는 베트남난민들은 1976년부터 1992년 말까지 총 79만 2,893명에 이르렀다.
캄보디아 킬링필드 200만 학살, 300만 난민
1975~1978년까지 캄보디아에서는 공산혁명 결과 200만 명 넘는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3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캄보디아 대학살의 주동자인 폴 포트(본명 ‘살로트 안사르․1925~1998)의 크메르루주 정권은 공산주의, 민족주의를 축으로 자본주의나 외세에 연계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다.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 공무원, 교수, 의사, 약사 등 전문직 종사자와 중류층 이상의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 대상이었다.
6·25사변 때처럼 손바닥에 못이 배기지 않은 사람들은 무조건 부르주아로 몰아 본인과 가족까지 학살했다. 크메르루주는 총알을 아끼기 위해 구덩이에 생매장시키고 우물에 처넣기도 했다. 심지어 일자무식 농민이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오해를 받고 죽임을 당했으며, 국제경기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운동선수 2천 명이 학살되기도 했다. 1만 명으로 추산되는 캄보디아 내 기독교인의 90%가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