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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구교수의 ‘한국전’ 왜곡

2005.11.12 17:07

관리자 조회 수:941 추천:144

[제러미 수리, “강정구교수의 ‘한국전’ 왜곡,” 조선일보, 2005. 10. 18, A35쪽; Jeremi Suri, 위스콘신대 교수.]

60년 전 일제(日帝)의 패망은 한반도를 두 개의 적대적 국가로 분할시켰다. 한쪽은 소련에, 다른 한쪽은 미국에 지배되었다. 두 국가와 양쪽의 보호자들은 모두 그들 각자의 정권 아래 민족이 통일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1950~53년의 파괴적 전쟁은 이런 다짐(통일)을 실현시키지 못했고, 한국인들의 고통과 분단을 연장시켰다.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은 전쟁으로 인한 상실에 슬퍼하며 통일을 염원하고 있다.

미래의 평화를 위해서는 정직하고 개방된 자세로 과거를 파악해야 한다. 한국전쟁에 대한 단순화되고 정치화된 판단은 더 많은 오해와 분란, 고통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한국전쟁에 관한 정확한 역사는 미래의 분란을 피하고 통일로 향한 진전을 가속화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강정구 교수가 최근, 미국이 한국의 통일을 ‘막았고' 한국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고 한 주장은 무책임하고도 부정확한 것이다. 그는 그에 반대되는 명백한 증거를 무시하고 있으며 한국전쟁의 유산을 왜곡하고 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북한에 있는 범죄적 정권을 변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강정구 교수의 역사적 부정확성이 바로잡히지 않으면 이것은 남과 북 한국인들의 진정한 이익을 해칠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대한 사실관계의 검증이 필요하다.

1990년대에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 정부 고위층의 기록들은 한국전에 관해 논쟁의 여지가 없는 세 가지의 사실들을 보여준다.

첫째, 북한과 소련, 중국의 지도자들은 남한을 기습 공격할 계획을 1950년에 서로 협의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동북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하려 했다.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은 1950년 6월 25일의 남침을 한국 해방을 위한 내전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토론과 전쟁계획 회의에서 한국인들의 소망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산주의의 팽창에 대해 얘기했다. 공산국가들은 분명히 침략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둘째,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은 미국의 강력한 대응을 예상하지 않았다.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1950년 1월 남한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하자 공산국가들은 그들의 적들에게서 취약 지점을 알아챘다. 그들은 별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손쉽게 영토를 장악할 수 있을 기회를 발견했다. 그들은 세계 다른 곳에서는 공격을 하려고 해도 억지(抑止)를 받았지만, 남한에 대한 공격 기도는 억지를 받지 않은 셈이다. 이런 증거들에 비춰보면, 미국은 강 교수가 주장하는 것만큼 지나치게 (대외적으로) 개입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미국은 6월 25일 이전에 침략을 억지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힘을 보여주지 못했다. 미국의 군사적 취약성은 공산주의자들의 호전성을 부추겼다. 전쟁 첫 수주일의 전황은 미국의 허약성 때문에 공산군의 진격을 물리치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음을 보여주었다. 한반도 인근에 주둔한 미군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고 대응도 너무 느렸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한국과 미국에서 여러 가지 논란을 안고 있는 인물이지만, 그가 조직한 영웅적 반격에 대해서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1950년 9월 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은 남한을 공산 지배로부터 구했고, 남한 사회가 북한의 침략자들에 대항해 자신을 지킬 수 있게 할 자원들을 제공했다.

셋째, 전쟁 3년 동안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북한의 전략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미국의 피를 흘리게 하고 공산주의의 세계적 팽창을 지원하기 위해, 김일성으로 하여금 전쟁을 계속하도록 부추겼다.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함께, 전쟁을 지속시키기 위해 광범위한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이들의 부추김에 따라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위신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의 고통을 연장시켰다.

그 과정에서 북한은 유례없는 가난과 고립, 자기기만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김일성은 한국인들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산주의 연대를 위해 전쟁을 계속했다. 공산주의 침략에 관한 이런 통찰들은, 과거엔 비밀이었지만 지금은 ‘국제 냉전사 프로젝트(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의 웹사이트(www.cwihp. org)에 게시되어 있는 정부 문서들을 통해 언제든지 접근할 수 있다.

남한과 미국도 전쟁기간 동안에 비난받을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인들은 자본주의보다 공산주의를 더 선호했다"는 강 교수의 주장은 정확하지 않지만, 남한의 이승만 정권이 억압적이고 인기가 없었다는 그의 주장은 옳다. 미국은 이승만 정부를 지지했지만, 그의 독재적 행동에 대해서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실 한국전쟁 발발 전에 애치슨 국무장관과 다른 미국 관리들은 이승만으로 하여금 중요한 개혁들을 단행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공격이 가져온 게 있다면 이승만과 미국을 더 가깝게 만든 것이고, 이승만에 대해 좀 더 민주적인 변화를 채택하도록 하려는 미국의 압력을 거둬들이게 만든 것이다.

1950~53년까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분명히 비판적인 분석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강 교수가 사용하는 식의 무책임하고 부정확한 용어로써는 아니다. 그는 한국전쟁과 냉전 일반에 대한 수정주의(revisionism)적 관점에 호응하고 있다. 수정주의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일단의 뛰어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으며 그들 중 일부는 강 교수가 박사학위 공부를 했던 바로 이 대학에서 가르쳤다. 수정주의자들은 미국이 공산주의의 위협을 과장했고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군사우선주의적 정책들을 추구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외교정책의 결점들을 부각시키는 데 있어서 이런 주장은 값진 것이었지만, 공산주의 침략전쟁이었던 한국전에 대한 미국과 남한의 초기 대응의 기본적 정당성을 결코 훼손할 수는 없었다. ‘탈수정주의(Post-revisionism)' 역사가들은 한국전쟁 동안 미국이 펼친 활동들의 방어적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이제는 핵 기술을 보유한 북한이 고립되고 호전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상태로 남아있는 이 세상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절대 필요한 일이다. 한국 정부와 국민 및 그 우방들은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해 협력해 감에 있어서, 북한의 공격성이라는 현실, 북한에 약하게 보이는 것의 위험성, 동북아 안정세력으로서 미국의 필요한 역할 등을 인식해야만 한다. 1950년 6월 25일 이후 미국은, 북한이 다시는 그의 살인적 정권을 한반도 전역에 확대할 뻔 하는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보장해 왔다. 한국민들은 미국의 잘못들은 비판해야 하겠지만, 진정한 위협은 북한에서 오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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