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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인 공권력(公權力)

2006.05.16 10:57

관리자 조회 수:1041 추천:152

[신지호, “고개 숙인 公權力,” 조선일보, 2006. 4. 28, A34쪽: 자유주의연대 대표, 서강대 겸임교수.]

얼마 전 국무총리실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반대투쟁 때문에 골치 아프니 이를 비판하는 칼럼을 어딘가에 기고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처음에는 “왜 나한테?”라는 황당한 느낌이었으나, 이내 “오죽하면…”으로 이해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미군기지 확장으로 평택이 전쟁터로 변할 것”이라는 민노당 등의 주장은 시대적 감각이 한참 뒤떨어진 공상소설 수준이다. 작년 12월 정부가 약속한 18조 8000억원(15년간)의 지원을 잘만 활용한다면, 평택은 오히려 환(環)황해권 국제도시로 거듭나 번영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좌파들의 생떼쓰기보다 우리를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시위대의 불법행동에 대한 당국의 미온적 대응이다. 법적 근거의 미비를 이유로 미군기지 이전 예정지역에의 경비불가 입장을 밝힌 어청수 경기지방경찰청장은 그렇다 치자. 국회의 비준동의를 받아 추진되는 국책사업이고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토지매수와 수용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점거행위에 엄정히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이 나라 공권력체계의 허술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결국 사태는 군 병력 투입검토와 반미세력의 결사항쟁 다짐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게 도대체 민과 군이 물리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란 말인가?

공공의 안녕과 질서유지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할 공권력의 어이없는 기능정지, 이는 임기제 경찰청장을 강제 퇴진시킬 때부터 이미 예고된 현상이었다. 시위대보다 경찰이 두 배 가량 더 부상당한 불법폭력시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임기제 경찰청장의 옷을 벗긴 것은 집권세력 스스로 공권력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행위였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민노당을 끌어들여 예산안을 성립시키고 사학법 장외투쟁을 하는 한나라당을 물 먹이는 정치적 이득을 얻었을지 모르겠으나, 공권력의 권위실추와 경찰의 사기저하라는 국가적 손실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제 공권력의 기능정지는 일반적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다. 경북 구미공단의 화섬업체 HK의 1, 2공장은 가동을 멈춘 지 오래다. 경영진의 구조조정에 반발한 노조원 500명이 지난 3월 11일 야간에 쇠파이프, 해머 등으로 공장 외벽을 무너뜨리고 침입, 관리직 사무원들을 집단폭행하여 내쫓은 후 불법무단점거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회사는 일선행정기관들에 공권력의 작동을 요청했으나, 그들은 권한 밖의 사항이라며 불법행위를 방치하고 있다.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로 우리에게 익숙한 화물연대의 전북지부 회원 200여명은 지난 22일 오후 두산테크팩 군산공장 불법진입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쇠파이프 등 흉기를 휘둘러 관리직 4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유리창 등을 파손했다. 그러나 경찰은 노사관계 영역이라는 이유로 꿈쩍도 않고 있다.

공권력의 무력화는 비단 경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가보안법은 굳이 폐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속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던 고무찬양죄의 경우 이미 수사에서 손 놓은 지 오래입니다.” ‘정보가 곧 국력’이라는 현재의 표어보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옛 모토가 더 마음에 든다는 20년차 ‘내곡동맨’이 고개를 떨구며 한 말이다.

지난 겨울 영화 ‘태풍’을 보다가 끝내 눈물을 흘렸다. 한국정부의 배신행위에 분노한 탈북자 씬(장동건 분)의 폭탄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출동하는 해군대위 강세종(이정재 분)은 만일 자신이 사망할 경우 어머니에게 전달될 편지에 이렇게 썼다. “혹시 이 편지를 받으시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와 제 동기들은 이 땅의 사내로 태어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국가란 합법적 강제력을 지닌 유일한 권력기구다. 해서 권위주의는 파괴되어야 하지만, 추상같은 권위는 살아 있어야 한다. 그 국가가 스스로 망가지고 있다. 자발적 기능정지에 빠진 경찰을 직무유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함으로써 사회적 경종을 울리는 시민행동에의 유혹(?)을 강렬히 느끼는 나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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