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은 北의 문화공작원
2006.06.10 13:49
[김성욱, “윤이상은 北의 문화공작원,” 미래한국, 2006. 5. 6. 6쪽; 미래한국신문 기자.]
윤이상은 생전에 동양의 정신을 서양의 악기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동시에 20세기 5대 작곡가로 꼽히며 현대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으로 일관된 반한(反韓)친북(親北) 활동을 벌여 온 인물이다. 67년 중정(中情)은 동백림 사건에 대해 유럽에 유학했던 대학교수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동백림(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과 북한을 왕래하며 벌어진 간첩사건이었다고 발표했었다. 윤이상은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년 후 형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윤이상은 동백림사건에 대해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음악가로서였다”며 당시 중앙정보부가 고문 등을 통해 간첩사건으로 조작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윤이상은 이 사건 이후에도 95년 11월 사망 시까지 북한을 계속 오가며 ‘민건회(민주사회 건설협의회)’ 회장, ‘한민련(민족민주통일 해외한국인연합)’ 구주본부의장, ‘한국학술연구원(KOFO)’ 원장, ‘유럽민협(재유럽 민족민주운동협의회)’ 고문 등 친북반한(親北反韓)성향단체에서 활동해왔다. 그는 90년 11월 20일 독일 베를린에서 남북, 해외범민련의 3자기구로 설립된 이적(利敵)단체 범민련의 공동의장직에 취임하기도 했다.
윤이상과 북한정권과의 연계성은 92년 ‘오길남 간첩사건’과 97년 황장엽 前북한노동당서기 입국 당시 재차 확인됐다. 오길남 박사는 독일유학 中 정치망명한 뒤 85년 입북(入北)해 한민전 대남흑색방송요원으로 활동하다, 86년 북한을 다시 탈출해 92년 한국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윤이상은 생전에 동양의 정신을 서양의 악기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동시에 20세기 5대 작곡가로 꼽히며 현대음악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으로 일관된 반한(反韓)친북(親北) 활동을 벌여 온 인물이다. 67년 중정(中情)은 동백림 사건에 대해 유럽에 유학했던 대학교수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동백림(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과 북한을 왕래하며 벌어진 간첩사건이었다고 발표했었다. 윤이상은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년 후 형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윤이상은 동백림사건에 대해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음악가로서였다”며 당시 중앙정보부가 고문 등을 통해 간첩사건으로 조작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윤이상은 이 사건 이후에도 95년 11월 사망 시까지 북한을 계속 오가며 ‘민건회(민주사회 건설협의회)’ 회장, ‘한민련(민족민주통일 해외한국인연합)’ 구주본부의장, ‘한국학술연구원(KOFO)’ 원장, ‘유럽민협(재유럽 민족민주운동협의회)’ 고문 등 친북반한(親北反韓)성향단체에서 활동해왔다. 그는 90년 11월 20일 독일 베를린에서 남북, 해외범민련의 3자기구로 설립된 이적(利敵)단체 범민련의 공동의장직에 취임하기도 했다.
윤이상과 북한정권과의 연계성은 92년 ‘오길남 간첩사건’과 97년 황장엽 前북한노동당서기 입국 당시 재차 확인됐다. 오길남 박사는 독일유학 中 정치망명한 뒤 85년 입북(入北)해 한민전 대남흑색방송요원으로 활동하다, 86년 북한을 다시 탈출해 92년 한국으로 돌아온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