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물이 빠져 흰 머리숱이 늘어나는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을 보면 안쓰러움이 없지 않다. 그녀는 날마다 ‘신규확진자 몇 명, 이 중 몇 명은 감염 경로 파악 안 된다’고 8개월째 똑같은 브리핑을 하고 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할지 본인도 모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코로나 발생 현황 브리핑이 그녀의 모든 직무처럼 됐다는 점이다. 방역 책임자라면 그 시간에 정말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어쨌든 나는 처음으로 질병관리청의 코로나 일일 발생 현황을 읽어봤다. 예상 밖에도 첫째 항목으로 ‘서울 도심 집회 관련’이 나왔다. 방송 등이 여기에 근거해 ‘광화문 집회발(發) 확진자’를 한 달 넘게 보도하고 있었던 셈이다.


어제 자 현황은 ‘4명 추가 확진돼 현재까지 누적 확진자 총 585명’이었다. 집회 관련(216명), 추가 전파(321명), 경찰(8명), 조사 중(40명)으로 세분해 놓았다. 감염 경로를 조사 중인 40명까지 ‘집회 관련’으로 포함한 발상이 흥미로웠다.


그날 광화문 집회에는 5만 여명이 참가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권력이 살아있음을 보여줘야 한다’고 격앙한 뒤로 휴대폰 위치 추적에 들어갔다. 상당수 참석자들이 진단 검사 종용 문자를 받았다. 개인 정보나 사생활 보호를 따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거동이 불편해 집안에서 지내는 한 80대 노인은 집회 단체 계좌에 후원금 몇 만원을 넣었을 뿐인데 어떻게 알고 이런 문자가 왔다고 한다.


그전까지 진단 검사는 증상을 신고해온 사람이나 밀접 접촉자들에게 이뤄졌다. 물론 진단 검사를 받으라는 것은 개인에게 전혀 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불응하면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말에 압박감을 느꼈다고 한다. 내 주위에 문자 받은 사람들치고 검사를 안 받은 이는 없었다. 이 엄청난 숫자의 검사에서 ‘집회 관련 확진 216명’이 나왔다.


하지만 감염자들은 그날 앞뒤로 여러 곳에서 숱한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 카페나 음식점에서 친구들과 떠들었을 수 있다. 광화문 광장보다 더 밀폐된 지하철과 버스·택시도 탔을 것이다. 그날 광화문에 나갔다고 거기서 꼭 감염됐다는 증거는 없다. 그 많은 집회 인파 중 왜 216명만 감염됐을까. 광화문에서 감염됐다면 감염시킨 이들은 또 어디서 감염됐을까.


그럼에도 정은경의 질병관리청은 한 달 넘게 ‘광화문발 확진자’를 발표하고, 매스컴은 그대로 보도하고 있다. 이는 현 정권에 야당과 일부 교회, 보수 진영을 마음 놓고 공격해도 좋은 근거가 됐다. 10명 이상 집회 금지의 정당성이나 개천절 집회는 불법이라는 논리가 가능해졌다. 현 정권이 끝날 때까지 정권 비판 집회 같은 생각은 아예 못 하도록 만들었다. 문 대통령의 칭찬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질병관리청이 정말 해야 할 일은 다른 데 있다. 가령 코로나 발생 현황에는 ‘지하철발(發) 확진자’는 하나도 없다. 광화문 집회처럼 무차별 검사를 안 해서인지 실제 안 나온 것인지 누구도 답변 못 한다. 만약 후자라면 코로나 전파에 가장 취약하다는 출퇴근 지하철에서 왜 발생이 없는지 이런 걸 조사하는 게 방역 당국의 역할이다. 모든 승객이 마스크를 착용해서인지 지하철 소독을 잘 해서인지를 조사해봐야 한다. 무차별 이동 감염 우려가 높은 전국의 버스나 택시에서도 한두 건밖에 보고가 안 됐다. 코로나 청정 비결을 알면 실질적으로 방역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발생 8개월이나 지났으나 어느 정도 밀폐된 공간이면 코로나에 취약한지조차 모르고 있다. 실제 무엇이 고위험 시설인지도 조사가 안 돼있다. 학교ㆍ학원ㆍ 독서실ㆍ 카페ㆍ 음식점ㆍ PC방ㆍ 노래방ㆍ사우나 등 어느 곳이 가장 취약한지 체계적인 샘플 조사를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자녀가 공부해야 할 학교는 문 닫게 해놓고 어른들의 술집은 허용하는 식이다. 현재 우리 국민의 감염 혹은 면역이 어느 수준인지 대규모 항체 검사를 실시한 적도 없다.


코로나 피해액만 수십조원대로 쌓이고 있는데, 추적ㆍ격리ㆍ폐쇄의 방역 대응이 지금 상황에서도 유효한지를 검토조차 하지 않는다. 단지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만 쫓아가고 있다. ‘수도권 2.5 단계’로 올릴 때나 다시 2단계로 내릴 때 어떤 과학적 근거도 없었다. 자영업자에게는 살고 죽느냐 문제인데, 주먹구구로 어떤 업종은 묶고 어떤 업종은 풀어준다. 불만과 원성이 너무 높으면 풀어주고, 또 확진자가 늘었다고 하면 묶는다. 문 대통령이 2.5 단계를 풀어주면서 “확산세가 서서히 진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다고 해야 하는가.


세상에는 방역 문제와 함께 고려해야 할 개인의 자유ㆍ기본권ㆍ경제ㆍ교육ㆍ 문화, 그리고 삶의 가치 등 숱한 영역이 있다. 지금은 방역을 앞세워 모든 것을 묻어버리고 있다. 정부가 어떻게 하겠다고 하면 국민은 찍소리 못하고 끌려가는 중이다. 역대 어느 정권도 이렇게 재미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