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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民辯이 답해야 한다

2012.02.16 13:25

관리자 조회 수:911 추천:87

[최원규, “이제 民辯이 답해야 한다,” 조선일보, 2012. 1. 11, A34.]

법조인에게 실체적 진실은 양보할 수 없는 가치다. 수사나 재판, 변론도 이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다. 법조인이 증거를 왜곡하거나 조작하려고 시도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건 어쩌면 법조인이기를 포기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북한노동당의 대남공작 조직인 225국의 지령을 받아 암약(暗躍)해 온 간첩단 '왕재산' 사건 재판에서, 변호인들이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정황이 드러났다. 지난달 23일 비공개로 열린 이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한 대학교수가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변호인들이 자신에게 "묵비권 행사를 요구했다"고 증언한 것이다.

이날 증언을 한 교수는 왕재산 전신(前身) 조직의 멤버였다. 그는 북한에 대한 환상을 깬 뒤 왕재산 조직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초기 활동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법정에서 왕재산 총책인 김모(구속 기소)씨의 지시로 월북해 1993년 8월 26일 김일성을 만나 '접견교시'를 받았던 사실을 증언했다. 그는 이어 김씨의 변호인 J씨가 작년 8월 자신을 찾아와 "(만약 공안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면) 묵비권을 행사해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J씨는 왕재산 총책 김씨의 메모를 받고 이 교수를 찾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 8월은 공안당국이 이 교수의 존재를 확인하기 넉 달 전이었다.

앞서 민변 등으로 구성된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연대'는 공안당국이 작년 8월 이 사건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자, '정국 돌파용 공안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공안당국이) 사건 관여자들이 대한민국 정부 전복을 모의했거나 새로운 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했다는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검찰의 기소는 부당함을 넘어 황당하기까지 하다.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 정권과 보수세력이 이 사건을 두고두고 악용할 것"이라고도 했다. '조작'이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거의 그에 준한다는 비판이었다. 민주노동당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일부 진보좌파 세력은 왕재산 사건에 대해 수사 초기부터 '조작된 사건'이라고 주장했고, 일부 인사들은 국가정보원 앞에서 시위도 했다. 민변 역시 그런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보자. 민변 소속 변호인들이 이 사건을 조작이라고 확신했다면, 굳이 그 교수를 미리 찾아가 묵비권 행사를 요구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럴 필요 없이 "그냥 아는 대로만, 있는 사실만 증언해달라"고 하면 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변호인은 증거 왜곡이나 인멸에 관여했다고 볼 여지가 있는 행동을 해가면서까지 중요한 증인에게 묵비권 행사를 요구한 것이다.

민변은 우리 사회에서 진보 세력을 대표하는 단체 중 하나이자, 법률가들이 모인 단체다. 일부 종북(從北)단체는 논외로 치더라도, 적어도 민변이 실체적 진실을 추구하는 법률가 집단이라면 이 사건을 아직도 조작이라고 판단하는지, 민변 소속 변호인들의 행위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답을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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