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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이단성

2016.06.10 11:44

김효성 조회 수:4738

칼 바르트는 현대신학의 여러 파들 중에 '신정통주의'라는 학파의 시조로서 구(舊)자유주의의 내재주의적(자연신론적, 범신론적) 경향을 비판하고 초월자 하나님의 계시와 그 내용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객관적(명제적), 신적 권위의 계시임을 부정하고 소위 '성경의 고등 비평'을 용납하며, 성경 속에 신화적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역사(Geschichte)와 인간 역사(Historie)를 분리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신학 전반은 칸트의 인식론(지식론)의 영향 안에 있다고 보인다. 칸트는 인간은 순수 이성으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들을 이해할 수 없고 인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기적들, 그리고 그 증거들의 확실성을 불확실하게 만드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의 저서들에는 위에 지적한 이단적 사상들이 이곳 저곳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몇 가지 예들을 열거해보자.

우리는 바르트의 사상 전반에 대한 이해에 관심이 없다. 그 방대한 저서들을 위해 시간을 들일 흥미도, 필요성도,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

바르트의 사상 연구는 학문적 흥미를 가진 자들의 몫일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의 저서에 나타나 있는 이단적 사상들에 대해 지적하고 비평하며 경고하기를 원할 뿐이다.


아래의 글들에서 인용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The Epistle to the Roman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33 (German edition, 1918). (『로마서강해』. 한들, 1997.)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Grand Rapid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28.

Church Dogmatics. Edinburgh: T. & T. Clark, 1936-1962. (『교회 교의학』. 황정욱 역. 대한기독교서회, 2006-2008.)

Dogmatics in Outline. London: S.C.M. Press, 1949.  (『바르트의 교의학 개요』. 대한기독교서회, 1956; 『교의학 개요: 사도신경 해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The Knowledge of God and the Service of God.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49. 

Christ and Adam. New York: Harper, 1957. (『그리스도와 아담』. 한국신학대학교, 1976.)

The Humanity of God. Richmond: John Knox Press, 1960.

칼 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고린도전서 15장 연구. 한국신학대학교, 1979.)


 

 1. 바르트는 성경이 객관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

말씀을 깨달음과 믿음은 하나의 사건이며 이 사건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을 그의 말씀이 되게 하는 한, 즉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다.7)

그러므로 성경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8)

계시와 성경의 직접적 동일시는 우리가 전제하거나 기대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한다. . . .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곳에서 계시와 성경은 하나가 된다.9)

어떻게 계시가 계시로 말미암음 외에 그 증거의 신적 내용으로 인식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계시를 계시로 말미암아 인식하는 것이란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는 계시에 의하여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의 그 이중적 역사를 사실 그대로 인식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은 그 안에 참여해야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은 계시 자체에 의하여 일깨워진 신앙을 가지는 것일 것이다.10)

 7) Church Dogmatics, I. i. pp. 122-123.

 8) Ibid., p. 124.

 9) Ibid., p. 127.

10) The Knowledge of God and the Service of God, pp. 66-67.


 2. 바르트는 성경이 무오(無誤)하지 않다고 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11)

축자(逐字, 단어) 영감이란, 오류와 결함이 있는 인간의 말을 그대로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과 그 인간적 오류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2

11) Church Dogmatics, I. ii. pp. 528-529

12) Ibid., p. 533.

 

 3. 바르트는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 전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13)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14)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동반하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15)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자체로는 그것이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16)

13)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65.

14)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65.

15) Church Dogmatics, III. i. p. 81.

16) Christ and Adam, pp. 54-55.


 4. 바르트는 하나님의 인성(人性)을 주장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그의 인성(人性)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아는 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볼 때이다.17)

이러한 신적 자유 의지와 선택에서, 이러한 주권적 결정에서(옛날 사람들이 말했던 대로, 그의 작정에서), 하나님은 인간적이다. 인간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긍정, 그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관심, 그를 위한 그의 자유로운 대리(代理)--이것이 하나님의 인성이다.18)

17) The Humanity of God, p. 49.

18) Ibid., p. 51.


5. 바르트는 성경의 천지 창조 기록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오직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19)   [그는 사가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설명했다.20)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비슷한 개념이다.]

   19) Church Dogmatics, III. i. p. 42.

20) Ibid., p. 81.


6. 바르트는 아담의 타락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 첫 번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된 자로서 존재했다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오직 사가(saga)일 뿐이다. . . . 그리고 타락, 즉 그 첫 사람의 타락이 발생했던 것은 바로 이런 영역에서, 다시 말해 예언적으로 증거된 말씀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이었다.21)

그렇다면 죄가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옴이 엄밀한 의미에서 역사적이거나 심리학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따른다. 원죄의 교리는, 서방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어왔던 바와 같이, 바울에겐 ‘매력적 가설’(리츠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의 의미에 대한 많은 역사적이며 심리학적인 왜곡들 중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온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나타난 의와 같이, 초시간적(timeless)이며 초월적이다.22)

   21) Ibid., IV, i, p. 508.

22) The Epistle to the Romans, p. 171.


7.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을 신화라고 한다.

우리의 세계가 예수 안에서 다른 세계에 의해 접촉될 때, 그것은 역사, 시간, 혹은 사물로 직접 관찰될 수 있기를 그친다. . . . 그리스도로서, 즉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역사의 종말이시다. 그리고 그는 오직 역설로서(키에르케골), 승리자로서(블룸하르트), 원시 역사로서(오베르베크)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있는 지평이시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지평을, 그는 수직적으로 위로부터 가로지르신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오직 문제 혹은 신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23)

    23) Ibid., pp. 29-30.


8.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분명히 긍정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주목할 만한 두 마디가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로서 사람, 진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주장함을 보려고 해야 한다.24)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25)

   24) Dogmatics in Outline, p. 96.

25) Church Dogmatics, IV. i. p. 5, footnote.


9.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28)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2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30)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31)     

   28)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29) The Epistle to the Romans, p. 30.

30) Church Dogmatics, IV. i. p. 335.

31) Ibid., pp. 335-336.


10.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실제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 사건 즉 비록 그것이 역사 안에서의(in) 유일한 실제적 사건이지만 역사의(of) 한 실제적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들은--물론 그것이 그들의 확신을 파괴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재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32)

   32)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11. 바르트는 보편 구원론적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 . .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33)

하나님의 ‘예’[용납]는 선언되었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 . . 그것은 영원 전부터 그가 아들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인류에 대한 그의 ‘예’이었고 ‘예’이다.34)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3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그 어떠한 종류의 제한을 가할 아무런 신학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의 신학적 의무는 그것이 우리가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36)

   33) Ibid.

34) Church Dogmatics, IV. i. p. 356.

35) The Humanity of God, p. 53.

36) Ibid., p. 62.


12. 바르트는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몸의 부활은 스캔들이요 부조리요 종교적 물질주의요 거침돌이다.”37)

   37) 칼 바르트, 죽은 자의 부활, 89쪽.


13. 바르트는 성경이 윤리의 객관적 규범임을 부정한다.

사람은 자유의 은사(gift)에 내재(內在)한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선을 행한다. 그는 그의 자유에 반대되는 법에 복종할 때 악을 행한다. . . .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지침과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명령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가 권위적 형태를 취하고 인간이 직면하고 측정되는 바 그 명령이 확고하게 되기 때문이다.38)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39)

   38) “The Gift of Freedom: Foundation of Evangelical Ethics,” The Humanity of God, p. 84.

39) Ibid., p. 85. 


[내용 출처]

김효성, 자유주의 신학의 이단성 (옛신앙, 2008), 17-24쪽.

  바로가기--> http://www.oldfaith.net/03modern/01자유주의신학.htm

         (혹은)  http://www.cps2014.net/00download/03modern/01liberalism.pdf


칼 바르트의 이상의 사상들은 분명히 이단적이다.

정통적 기독교회는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한 객관적 계시의 말씀이라고 믿으며 성경이 증거하는 모든 역사적 사건들을 믿는다. 성경의 신적, 객관적, 절대적 권위성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성경관이며 종교개혁의 유산을 받은 주류파 교회들(개혁교회, 루터교회, 영국교회)의 성경관이다.

정통적 기독교회는 천지 창조와 아담의 타락을 역사적 사건으로 믿는다. 신자가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를 믿지 않는다면, 성경의 다른 곳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정통적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과 육체적 부활과 그 자신의 재림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본적 사실들을 부정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증거들을 부정하고 사도신경의 고백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것은 확실히 이단이다.

정통적 기독교회는 보편구원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가는 생명에 이르는 자들은 적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는 멸망에 이른 자들은 많다고 말씀하셨다(마 7:13-14).

정통적 기독교회는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을 믿는다. 히브리서 6:2은 이것이 터를 다시 닦을 수 없는 기본 교리라고 말했다.

정통적 기독교회는 성경이 윤리의 객관적 규범임을 믿는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모든 목사들과 장로들이 임식서약 때 해 왔던 첫번째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런 근본적 내용을 부정하는 사상은 분명히 이단이다. 성경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본적 사실들을 부정하는 이런 사상이 이단이 아니라면, 무엇이 이단인가? 칼 바르트는 오늘날 개혁주의 한 모본이 아니고 이단적 신학자이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를 두둔하는 목사나 교단은 이단을 두둔하는 목사이며 교단이다. 우리는 그런 목사들과 교단을 책망하고 경계해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교단에 머물지 말고 그런 타협을 책망하고 나와야 한다.

오늘날 교회들은 세 부류가 있다. 첫째는 자유주의 신학에 이끌림을 받는 부류이고, 둘째는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부류이고, 셋째는 자유주의 신학을 분명하게 배격하고 성경적, 전통적 바른 신학을 보수하는 부류이다. 첫 번째 부류는 오늘날의 사두개파이며, 둘째 부류는 오늘날의 여호사밧 같은 자들이다. 세 번째 부류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충성된 부류이다.

세 번째 부류에 속한 지도자들만이 미가야 같고, 엘리야 같은 자들이다. 그들만이 역사상 초대교회의 아다나시우스 같고, 종교개혁시기에 루터와 칼빈 같고, 근대에 J. 그레셤 메이천이나 에드워드 영이나 코넬리우스 반틸이나 죤 머리 같은 자들이다.

오늘날은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이다. 우리는 교회들을 분별하고 바른 교회에 속하고 바른 교회를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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