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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제도화’로 ‘평화보장’ 못해

2006.04.19 14:11

관리자 조회 수:972 추천:162

[박용옥, “‘평화의 제도화’로 ‘평화보장’ 못해,” 미래한국, 2006. 3. 6, 6쪽; 한림국제대학원 부총장·전 국방부 차관.]

금년 첫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지난 2월 17일 노 대통령 주재로 열렸다. 이 회의에서 ‘한반도 평화의 제도화’를 올 한 해의 안보정책목표로 설정했다. 또 이 목표달성을 위해 ‘북핵문제 해결구도 수립과 한반도 평화체제 전기 마련’, ‘한미동맹 조정협상 마무리’, ‘지속적인 신뢰구축으로 남북관계의 질적 도약’, ‘대북 인도주의 현안의 적극적 타개’, ‘국방개혁의 가시적 성과 도출’, ‘안보정책에 대한 국민신뢰 제고’ 등 여섯 가지 정책과제도 선정했다. 이 안보정책목표와 정책과제들은 그간 노 대통령 자신이나 통일부, NSC 등 안보관련 부처 고위관계자들이 그간 국내외에서 남북관계, 한미관계 등에 관해 피력해 온 견해들을 한데 묶어 정리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난 3년간 노무현정부의 3대 정책기조라 할 수 있는 ‘협력적 자주국방’, ‘동북아 균형자 역할’, ‘남북민족공조 및 신뢰구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간 노무현정부의 이런 정책기조가 다분히 대북협력강화 및 대미의존 축소의 색채를 띠어 온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번 NSC가 설정한 안보정책목표와 정책과제들도 다분히 그런 방향으로 지향될 가능성을 예상하게 된다. 현 시점에서는 기대(期待)보다 우려(憂慮)가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안보당국자들은 ‘한반도 평화의 제도화’, 즉 평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고 해서, 평화가 저절로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역사적 교훈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난 30여 년 간 우리의 역대 정부는 평화적 남북관계의 제도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72년 ‘남북 7·4공동성명’과 ‘남북조절위원회’ 합의,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및 이의 이행·준수·감독을 위한 정치·군사·경제·사회 등 각 분야별 ‘부속합의서’와 ‘남북공동위원회’ 합의, 2000년 남북 정상 간 ‘6·15 공동선언’, ‘장관급회담’ 및 각종 실무회담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북한의 대남도발은 끊이지 않았고, 특히 작년 2월 10일에는 북한당국이 ‘핵무기보유’를 공식 선언함으로써 한반도를 ‘핵무기지대’ (nuclear-weapons zone)로 변질시키는 등 안보환경은 오히려 훨씬 악화되어 있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의 한반도 평화는 어떤 제도적 장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군사력, 한미연합방위체제 등 확고한 군사대비태세에 의해 유지되어 온 것이다. 이번 NSC의 안보정책목표 설정은 이런 역사적 교훈을 간과한 것 같다.

또한 현 정부의 이런 안보관은 정책목표 우선순위가 뒤바뀐 결과라 할 수 있다. 평화를 위해 먼저 안보태세를 굳건히 하는 개념이 아니라, 먼저 평화를 추구하면서 그 결과로 안보환경이 개선될 것을 기대하는 개념이다. 즉,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옛 로마격언의 현실적 사고방식과는 반대로 ‘전쟁에 대비하는 대신에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식의 ‘극단적 평화주의’(extreme pacifism)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남북관계와 한반도 상황은 이런 평화주의적, 이상주의적 발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안보당국자들은 이런 객관적 현실을 도외시하면 안 된다.

이번 NSC에서 선정한 여섯 가지 안보정책과제들도 결국 ‘한반도 평화의 제도화’라는 금년 안보정책목표를 지향하는 과제들이란 면에서 볼 때, 이 과제들이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안보환경에 미치게 될 영향이 우려된다. 북핵문제가 벌써 몇 년이 지난 문제인데 지금 와서 다시 그 해결구도를 수립하겠다는 것인가? 10여 년 전에 이미 남북한은 서로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고, 재처리와 우라늄농축도 하지 않기로 합의하면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런데 북한은 작년 2월 핵무기보유를 선언했고 또 지금도 계속 늘려나가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형국이다.

실정이 이렇다면 아직도 그 ‘해결구도를 수립하겠다’가 아니라 ‘북핵제거를 위해 한미공조 등 국제공조관계를 강화하겠다’를 최우선적인 정책과제로 선정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 대안일 것이다. 북핵문제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와 연계하여 장기적 과제로 다룰 정도로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현 안보당국자들이 당장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 표면적인 남북관계개선만이라도 이루기 위해 지금 우리 안보환경에 심각한 군사위협 요인으로 등장한 북한의 핵무기보유에까지 눈을 감는 대북유화(宥和)의 늪에 빠져 안보위기상황을 초래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 과제는 시대적 상황변화에 부응하여 이루어지는 당연한 일이다. 단지 조정대상의 성격에 따라 협상의 우선순위 및 완급(緩急)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주한미군 재배치, 용산기지 이전,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등 이미 협의를 마친 문제들의 원만한 이행을 위한 구체적인 실무협의를 금년 내로 마무리하는 것은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NSC의 결정이 전시작전통제권, 주한미군 역할·임무의 추가인수, 연합사 지휘체제 등 협의 중에 있거나 앞으로 협의해야 할 문제들도 금년 내로 협상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이라면, 이는 무리일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시한부적으로 조급하게 서두를 문제가 아니다. 우리 군의 준비태세에 따라 필요한 시기에 언제든지 추진할 수 있는 문제들이며, 특히 정치인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판단할 문제는 더욱 아니다.

특히 북한의 핵무기 보유로 인해 한반도 군사환경이 ‘핵무기지대’로 변질된 현실여건 하에서 한국이 독자적으로 대북억제 및 대응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미국으로부터의 ‘핵우산’은 지속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신중한 검토와 함께 한미동맹 조정을 위한 협상방향과 협상속도가 검토돼야 한다. 즉, 한미동맹 조정협상은 안보태세 및 대북억제태세를 확고히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이 과제는 남북 쌍방이 서로 상대방을 합리적인 대화상대로 인정하고, 합의사항은 존중되고 실천된다는 일말의 신뢰감을 가질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따라서 이것은 단기간 내 시한부적으로 이룰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북한은 핵문제와 관련하여 미국과의 양자대화가 가능해진 90년대부터는 한반도 안보 및 평화문제는 남북한 사이에서가 아니라 미·북 양자 간에 협의될 문제며 남한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남북 군사대화는 군사적 신뢰구축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자리라기보다는 그들의 정치적 목적 또는 대남전략상 필요에 따라 때로는 실무급 회담에 응하기도 하고 때로는 남측 제의를 일축하는 자세를 취해 왔다.

특히 미국과의 대화를 기대할 수 없고 이로 인해 국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는 남북대화, 특히 남측과의 군사대화를 국면 타개책의 일환으로 시도하는 경향이 있다. 1980년대 말 이후에서 1990년대 초까지의 남북고위급회담 등 활발한 남북대화는 미국과의 양자대화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여건에서 이루어진 남북대화의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과의 신뢰구축, 특히 군사신뢰구축은 북한의 개혁개방 등 체제 변화 없이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의 모든 남북대화는 북한의 체제변화를 적극 유도해야 하며, 현 체제를 유지·강화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최근 정동영(鄭東泳) 전 통일부 장관(현 열린우리당 의장)은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되면 2015년 이전에 군병력을 현재의 절반 수준인 30만-40만 규모로 축소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절감되는 국방비 여유분을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참으로 당혹스런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양극화문제 제기 직후 재원 마련과 관련하여 처음 나온 여권 핵심인사의 언급이다. 즉, 한편으로는 남북 신뢰구축 등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군병력과 국방비 모두를 감축하여 양극화 해소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 정부와 여권의 안보정책 구상이라면, 이런 분위기에서 추진되는 국방개혁이 과연 어떤 가시적 성과를 보여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병력 및 국방비 모두를 감축하면서 우리 군이 첨단정예군으로의 탈바꿈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현실과는 거리가 먼 잘못된 상황인식일 뿐만 아니라 주변국 군사동향에는 아예 눈을 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떤 현안이 포함되는가가 문제다. 단지 이산가족의 정례적 상봉 행사에 만족하거나, 또는 이와 병행하여 국군포로 및 납북자의 생사확인 또는 송환 문제를 북측에 제기만 하고 그들이 호의적으로 반응해 주기만을 무한정 기다리는 등의 미온적 자세는 식상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남북관계의 질적 도약에도 아무런 기여도 못하고 있다.

이제는 국제공조 하에 북핵문제와는 별도로 북한 ‘인권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며 북한체제의 본질적 변화를 유도해야 할 때다. 북한에게는 ‘인권’보다 ‘생존권’이 더 절박한 문제라면서 대북지원에 급급하는 자세로는 국제적인 공감도 못 얻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가치와 이념을 북한에게는 물론 국제사회에도 분명히 각인시킬 수도 없다.

이런 식의 대북정책과 대북협상은 대북 인도주의 현안에 대한 적극적 타개책도 아니고 북한체제의 질적 변화와도 무관할 것이다.
현시점에서 우리 안보정책 목표의 최우선 순위는 ‘한반도 평화의 제도화’ 보다는 ‘북핵문제의 완전해결’ 또는 ‘북핵의 완전 제거’에 두는 것이 우리 안보현실에 비추어 더 타당할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우리 군의 대북 군사 태세는 무의미해지며, 독자적 대북억지는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동맹관계와 연합방위체제마저 흔들리게 된다면, 이는 대한민국의 안보기반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현 노무현정부가 정책기조로 삼은 ‘협력적 자주국방’, ‘균형외교’, ‘남북신뢰구축’ 등은 모두 확고한 한미동맹관를 바탕으로 추진돼야 하며, 특히 균형외교, 남북신뢰구축, 전시작전권을 비롯한 한미동맹 조정협상 등은 북핵문제의 완전해결 후에 추진해도 늦지 않다.

중요한 문제는 유사시 대한민국의 안보태세를 보장하는 것이며, 그 전제조건은 무엇보다 한미 양국 간의 신뢰관계라 할 수 있다. 이번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선정한 안보정책과제들을 보면 현재 우리 안보환경에 가장 위협적인 북핵문제의 안보적 및 군사적 심각성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 ‘한반도 평화의 제도화’는 항상 바람직 한 것이다. 그러나 확고한 안보태세가 전제되지 않는 한 그 실효성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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