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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6․25를 ‘위대한 抗美援朝(항미원조) 전쟁’이라 했던 시진핑,” 조선일보, 2014. 7. 11, A30쪽; 박정훈 디지털 담당 부국장.]

우리가 중국 앞에서 이 정도 대접받고 큰소리도 치는 것은 아마 고구려 멸망 이후 처음일 것이다. 수(隋)․당(唐)에 맞짱 뜨던 고구려가 7세기 중반 망한 뒤로 한반도는 늘 중국에 시달림당하는 약자(弱者) 신세였다. 중국은 한반도에 대해 패권국(覇權國)으로 군림했고, 군사적으로 침략한 일도 잦았다. 6․25 당시 코앞까지 왔던 남북통일을 무산시킨 것도 중국이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의 적극적인 대한(對韓) 접근을 보고 우리가 많이 컸다는 것을 실감했다. 긴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최근의 한․중 관계는 극히 이례적인 시기다. 한․중 관계 2000년사(史)에서 두 나라가 이렇게 대등한 밀월(蜜月)을 누렸던 적이 없다. 지금 우리는 '단군 이래' 처음으로 중국보다 잘살고, 경제․기술력과 문화․소프트 파워의 질적(質的) 수준에서 앞섰다. 또한 우리는 동북아 지정학(地政學) 게임의 균형추를 좌우할 핵심 플레이어가 됐다. 시 주석의 '구애(求愛)'도 한국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 주석이 1박 2일간 쏟아낸 우호․친선의 수사(修辭)는 한국인들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가 한국을 '친척집'에 비유한 것은 진심일 것이다. 그러나 양국 관계에 관한 시 주석의 역사관이 너무 낭만적이거나 편의적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그가 한․중 관계사(史)를 '수천 년 두터운 정(情)의 역사'로 풀어낸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자기 편리한 것만 골라서 얘기하는 바람에 한국인의 평균적인 인식과는 적지 않은 격차를 보였다.

시 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역사적으로 위험이 발생할 때마다 양국은 고난을 함께 극복했다"고 말했다. 그는 임진왜란과 일제(日帝) 시대 한․중의 공동 항쟁을 예로 들었다. 맞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 기억에서 중국은 우군(友軍)보다 침략자였던 경우가 더 많았다. 고구려는 수 양제와 당 태종의 침략을 당했고, 고려는 원(元)의 지배를 받았다. 병자호란 때 청(淸)은 조선 임금을 무릎 꿇리고 절하게 하는 '삼전도의 굴욕'을 자행했다. 6․25 때만 해도 중국은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눈 주적(主敵)이었다.

여기까진 먼 옛날의 과거 역사니까 하고 넘어간다고 치자. 문제는 중국의 '역사 침범'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아리랑과 단오절․온돌을 중국 것이라 주장하고, 김치의 연고권까지 내세우고 있다. 이런 중국의 역사 팽창주의는 언제 폭발해 우리를 향해 비수로 날아올지 모른다. '두터운 정의 역사'로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기엔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우리에겐 분출하는 중화(中華) 민족주의의 폭풍에 당했던 기억들이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중국 관중은 한국 선수들만 찍어 야유를 보냈고, 성화 봉송 과정에선 중국인 수천 명이 서울 한복판에서 난동을 부렸다. 중국군 참모총장이 한국 국방장관을 앞에 놓고 일장 연설하는 무례(無禮)도 있었다. 심지어 불법 조업 중국 어선을 단속하자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문명적인 법 집행'을 요구하는 적반하장까지 했었다.

시 주석이 마음먹고 보내온 친선의 제스처에 재를 뿌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편리하게 좋은 면만 내세우며 덮고 넘어갈 만큼 한․중 관계의 기반이 단단하지는 않다. 시 주석은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두 나라가 공동 전선을 펼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한․중 간에는 일본 못지않은, 어쩌면 일본보다 더할 갈등 요인이 수두룩하다.

'세월호' 사고로 한국 해경의 손발이 묶인 사이 서해 앞바다엔 불법 조업하는 중국 어선들이 가득 깔렸다. 이어도를 둘러싼 EEZ(배타적 경제수역) 협상에서도 중국은 한 치도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일본은 과거사의 원죄(原罪)가 있기에 우리가 뭐라 하면 움찔하는 시늉은 한다. 그러나 중국은 그렇지 않다.

시 주석은 부주석이던 2010년, 6․25를 '위대한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돕는) 전쟁'이라고 공개 발언한 일이 있다. 6․25 60주년 좌담회에서 중국군의 참전에 대해 그는 "(미군의)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었다"고 했다. 시 주석이 6․25에 관한 중국 공산당의 공식 견해를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그만큼 역사 인식의 격차가 크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시 주석이 한 상 가득히 차린 '중국 파티'를 우리가 마다할 이유가 없으나 너무 취해선 곤란하다. 파티가 끝나면 찾아올 숙취(宿醉)를 생각하면서 우리 페이스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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