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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보수장로교친교회 강의 (2019년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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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에 대한 새 관점’에 대한 비평

김효성 목사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파의 주장

바울에 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s on Paul) 학파의 계보 혹은 대표적 인물들은 스텐달,1) 샌더스,2) 제임스 던,3) 톰 라이트,4) 김세윤5) 등으로 알려져 있고 우리나라의 최갑종,6) 권연경,7) 김영한,8) 임태수9)등도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바울의 새 관점을 주장하는 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한다.

1. 언약적 율법주의. 사도시대 유대교는 언약적 율법주의 종교이었다. 언약의 내용이 율법이며 그 안에 속죄의 법도 있었고 유대교는 율법 준수를 통해 은혜언약 안에 거했던 은혜의 종교이었다.10) 이 점에 대해서는 모두들이 공통적인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의 유대교 이해에 대해서는 견해가 나뉘는 것 같다. 샌더스는 바울이 유대교를 율법주의적 공로종교로 오해하고 왜곡시켰다고 보지만,11) 제임스 던은 그의 바울 해석을 거부했다.12) 톰 라이트는 바울이 사도 시대의 유대교 신학인 언약적 율법주의를 버리지 않았다고 본다.13)

2. 칭의를 법정적 개념보다 관계적 개념으로 봄. 칭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복이며 그것은 율법을 준행하는 새 삶을 의미한다. 톰 라이트는 이신칭의 교리가 바울이 뜻한 것이 아니고 바울은 개인 영혼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바울의 주관심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세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 신실하심이며 바울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온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새 가족이 되었다는 뜻이며, 새 삶은 율법 준행의 삶이다. 마지막에 이루어질 메시아 왕국은 유대인들이 세계를 통치하는 것이다.14) 김세윤 교수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로 만드는 것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 칭의이며 의인 됨은 믿음의 순종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15) 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이라는 뜻에서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가 된다.16)

3. 미래적 칭의를 주장. 톰 라이트는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현재의 칭의가 미래의 칭의의 근간이며 선행이 성령의 역사의 결과라고 말하면서도, 행위 심판의 구절들에 근거해 미래적 칭의를 말한다.17) 그는 바울이 예수님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순종하는 삶을 살아 그 순종의 삶에 근거해 최후에 칭의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한다.18) 김세윤 교수도 칭의가 종말까지 유보되었다고 말한다.19) 유보적 칭의를 말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만으로 칭의가 끝나지 않으며 행함이 수반되어야 하며 종말 심판 때 비로소 칭의가 선언된다고 본다.20)

4. 믿음만이 아니고 믿음과 행위가 칭의의 조건이라고 말함. 새 관점 학파는 종교개혁자들과 전통적인 개신교회의 이신칭의 교리가 결함이 있다고 본다. 사람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위가 있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21) 그들은 행위 심판, 윤리 명령, 구원 상실 경고 등의 성경구절들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22) 새 관점 학파의 견해는 결국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다.

임태수 교수는 구원의 조건, 즉 천국 들어가는 조건이 믿음과 행함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한다. 그 근거로 마태복음 7:21을 든다. 그는 자신이 이신칭의를 부정하지 않으나 성경에 이행칭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가 근거로 드는 성경구절은 야고보서 2:24; 신명기 6:25; 마태복음 5:20; 마태복음 25:31-46; 로마서 8:4 등이다. 또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의 충분성과 완전성을 부인한 일이 없다고 한다. 또 그는 어거스틴도 자신을 지지한다면서 그의 글을 인용한다. “구원을 위해서는 ‘믿음으로만’으로 충분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확신이다”(어거스틴, 믿음과 행함에 관하여, 14장). 또 그는 행함이 믿음과 함께 구원의 조건이라는 성경구절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면서, 구약의 모든 율법을 비롯하여 마태복음 25:34-36. 마태복음 19:16-19 (17절,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누가복음 10:25-28 (28절,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요한복음 5:29. 고린도전서 6:8-10. 갈라디아서 5:18-21. 에베소서 5:5. 야고보서 2:14 등이 그러하다고 말한다.

5. 구원의 탈락 가능성. 새 관점 학파는 현재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자들의 구원의 탈락 가능성을 인정한다.23) 즉 성도의 견인 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김세윤 교수는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도 순종의 조건을 충족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종말의 칭의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말한다.24)


‘바울에 대한 새 관점’에 대한 비평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파의 사상은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을 오해한 이단 사상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미 그런 이단 사상을 경고하였다.

1. 칭의의 법정적 성격을 부정하고 관계적 개념을 말하는 것은 복음의 부정이다.

성경이 말하는 칭의(稱義)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그의 십자가 대속사역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의를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고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없고 따라서 복음이 없는 것이다. 이승구 교수는 톰 라이트의 새 관점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轉嫁)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바르게 비평했다.25)

2. 미래의 칭의 혹은 유보적 칭의를 말하는 것은 칭의의 단회성과 완전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칭의는 단번에 완전하게 얻는 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셨고 의는 도덕적 완전을 말하며 예수님 믿는 자들은 그 의에 근거하여 단번에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해졌다. 물론 이것은 법적인 개념이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완료분사),”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완료시제).” 서철원 교수는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에 대해 믿는 자들이 최종 판정 전이니 죽은 후 천국은 못 갈 것이며, 그렇다고 지옥도 바로 간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니, 그러면 연옥 교리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꼬집어 비평하였고, 또 성경의 칭의는 종말론적 칭의 선언이며 신자는 죽으면 즉시 하나님 품에 안긴다고 바르게 말했다.26)

3. 행위를 칭의의 조건 즉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것은 이단적 오류이다.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지 않고 매우 해이해져 있는 현실을 심각한 문제로 여기며 행위를 강조하는 동기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여기는 것은 복음을 부정하는 이단적 오류이다. 선한 행위, 순종의 행위는 구원의 증거와 열매로서 마땅히 강조되어야 하지만,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순간 그것은 성경의 은혜의 복음에서 이탈하고 갈라디아서가 경계한 이단이 된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사람의 선한 행위는 늘 부족하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필요가 없다.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행위에 근거하려 하면 그는 영원히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는 꼭 필요하지만, 참된 믿음의 증거이며 열매일 뿐이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갈라디아서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박영돈 교수는 김세윤 교수와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파가 칭의론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했다고 비평하며 행함이 결코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없고 단지 칭의의 열매이며 참 믿음의 증거라고 바르게 말했다.27)

4. 구원받은 성도의 구원의 탈락 가능성을 말하는 것, 즉 성도의 견인을 부정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주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요 10:27-28), 사도 바울도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말했다(빌 1:6).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불변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중보사역의 완전성과 성령의 인치심의 진리는 성도의 견인 진리를 확증한다. 박형용 교수는 김세윤 교수의 강의에 대해 칭의된 자의 구원 탈락 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구원 탈락을 말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실패로 보는 것이 된다고 바르게 비평하였다.28)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은 결국 율법주의이며 행위구원론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율법주의요 행위구원론이다. 이것이 천주교회의 교리이며 실상 알미니안이나 웨슬리안의 교리이다. 노승수 목사는 톰 라이트의 미래 칭의 개념이 행위구원론을 위해 문을 여는 신학적 후퇴이며, 미래 칭의에 우리 행함이 어떤 효력을 발생한다면, 그것은 행위구원론이 된다고 비평했다.29) 이승구 교수는 톰 라이트의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반(半)펠라기우스주의라고 비평했다.30) 김병훈 교수도 새 관점 학파의 언약적 율법주의는 반(半)펠라기우스주의의 오류이며 결국 천주교회 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비평했다.31) 최덕성 교수도 새 관점 학파의 칭의론은 결국 로마천주교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비평했다.32)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

칭의는 복음의 핵심적 진리이다. 이신칭의(以信稱義)가 복음이다. 그것은 로마서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된 복음이다.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사역과 그 완전한 의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은 믿는 우리가 실제로는 부족함이 없지 않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에 의지하여 법적으로 얻게 되는 의를 말한다.

로마서 3:20-22,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9:30-3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의의]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로마서 10:2-4,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사도행전 13:38-39,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고린도전서 4: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야고보서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천주교회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왜곡시켰다. 천주교회의 트렌트 공회는 개신교 교리를 반박하였다. 그들은 종교개혁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 칭의를 가져올 수 없고 믿음은 의롭다 함을 위한 준비일 뿐이고 믿음만으로는 안되고 계명들을 지켜야 영생을 얻으며 사랑의 열매, 즉 믿음과 회개의 열매가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다. 또 그들은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임을 강조하며(약 2:17) 칭의가 믿음에서 나오지 않고 행함에서 나온다고 말했다.33) 천주교회는 결국 율법주의, 행위구원론을 주장한 것이다.

존 웨슬리의 교리도 천주교회의 구원론처럼 결국 행위구원론으로 돌아갔다고 보인다. 웨슬리는 사람이 선행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구원을 얻으며 선행이 구원에 본질적 요소이고(Works, VI, 48, 50), 칭의는 선한 행위들 즉 성화로 받으며(Works, V, 56-57), 선행을 게을리하면 결코 칭의받지 못하며(Works, VI, 50), 믿음이 칭의의 유일의 직접적 조건이지만(Works, VI, 48, 49-54), 그러나 회개의 열매를 통해 칭의가 오며(Works, VI, 48), 완전성화로 칭의를 받으며(Works, VI, 44), 성화하지 않는 자는 칭의받지 못하며(Works, V, 57), 칭의는 선물이 아니고 획득사항이라고 보았다(Works, V, 57).34)

그러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신칭의의 복음을 재발견했고 밝히 증거하였다. 역사적 개신교회들의 신조들, 즉 개혁교회의 프랑스 신앙고백(1559년) 17, 18, 20조, 벨직 신앙고백(1561년) 23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563년) 60-62문답, 제2 서서 신앙고백(1566년) 15장,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 11장 뿐만 아니라, 루터교회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1530년) 4조와 일치신조(1577년) 3조나, 영국교회의 39개 신조(1562년) 11조 등은 공통적으로 사람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고백하였다.3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2,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영접하며 의지하는 신앙은 의롭다 하심(칭의, 稱義)의 유일한 수단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3문답, “칭의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이신데, 거기에서 그는 오직 우리에게 전가(轉嫁)되고 믿음으로만(by faith alone) 받는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들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 앞에 의로운 자로 받으신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0문답은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진술하였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1문답은 내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 이유는 나의 믿음의 가치 때문에 하나님께 열납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만족과 의와 거룩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이기 때문이며, 내가 오직 믿음으로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받을 수 없고 내 자신에게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진술하였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2문답은 우리의 선한 행위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의 전체나 일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모든 점들에서 하나님의 법에 일치해야 하며, 또한 이생에서의 우리의 최선의 행위들이 모두 불완전하고 죄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이라고 진술하였다.


성화(聖化)와 선행의 중요성

그러나 성화도 똑같이 중요한 성경적 진리이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의 한 중요한 동기는 교인들의 해이한 삶의 현실이라고 보인다. 그것은 우리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왜곡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칭의를 강조함이 없는 성화의 강조는 율법주의에 떨어질 위험이 있지만, 성화를 무시한 칭의의 강조는 반(反)율법주의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그 예가 구원파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조하신 대로 또 사도들이 교훈한 대로 거룩하고 선한 행위에 대해 강조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룩하고 선한 행위와 삶을 힘쓰고 애써야 한다.

마태복음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는 첫째,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이며, 둘째, 성도의 성심의 율법 준행을 의미한다고 본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첫째로 구주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둘째로 성경 교훈대로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7: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요한복음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로마서 6:11-13,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곧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전통본문)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죄악된]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경고). 로마서 11:21-22,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경고).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그리스도의 삶의 첫 번째 원리).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라디아서 5:13,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라디아서 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성화를 위해 열심을 내라는 뜻). 데살로니가전서 4: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야고보서 2: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베드로후서 1:5-7,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베드로후서 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요한일서 3:9-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계속]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한계시록 21:8,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우리의 신앙고백서도 이 점에 대해 균형 있게 진술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1:2,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영접하며 의지하는 신앙은 의롭다 하심(칭의, 稱義)의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안에 홀로 있지 않고 항상 다른 모든 구원적 은혜들을 동반하며, 죽은 신앙이 아니고 사랑으로 역사(役事)한다.” 신앙고백 15:3, “비록 회개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인, 죄를 위한 어떤 만족이나 죄 용서의 어떤 원인으로 의지되어서는 안되지만, 그것은 모든 죄인에게 매우 필수적이어서 아무도 그것 없이는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 신앙고백 16:2,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한 순종으로 행해진 이러한 선행들은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의 열매와 증거니.” 신앙고백 16:3, “선행을 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은 전혀 그들 자신들에게서 나오지 않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온다. . . . 하지만 그들은 이것 때문에 마치 성령의 특별한 감동 없이는 어떤 의무도 행할 책임이 없는 것처럼 게을러져서는 안 되고, 마땅히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불일듯하게 하는 데 부지런해야 한다.”

제2 서서 신앙고백 16장도 우리가 선한 행위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든가 선행이 구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해서 선행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동시에,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오직 믿음으로 된다고 해서 선한 일을 쓸데없다고 무시하고 그런 것에 마음을 둘 필요가 없다고 하는 모든 사람을 정죄한다고 진술하였다.

성경은 성화의 당위성과 구원의 확실성을 분명하게 교훈한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이것은 일차적으로 성화를 가리킨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35, 37-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와 같이, 성화와 선행은 중요하다. 칭의와 성화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서 어느 하나를 부정하거나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최덕성 교수는 “칭의 없는 성화나 성화 없는 칭의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칭의를 얻는 자는 필연적으로 성화를 수반한다,”36) “성화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기독인은 믿음과 구원이 확실한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37)고 바르게 말했다. 박영돈 교수도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거룩함의 열매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따 놓은 당상이라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것은 복음의 심각한 변질이라고 말하며 거룩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성경말씀에서 완전히 벗어날 뿐 아니라,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라고 말했다.38)


결론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즉 행위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율법주의는 잘못이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정죄한 다른 복음이며 이단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에게 행위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행위가 늘 부족하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뜻이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다. 그러나 선한 행위는 참 믿음의 증거와 열매이며, 구원의 증거와 열매이다. 그것은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율법 순종의 행위나 선한 행위를 무시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반(反)율법주의는 잘못이다. 그것은 도덕적 해이로 나아간다. 다시 정리하면,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고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계명 순종의 선한 행위는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은혜에서 떨어지고 율법주의 이단에 떨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계명 순종의 선한 행위는 구원의 증거와 열매로서 꼭 필요하며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참고 도서

Dunn, James D. G. 바울에 관한 새 관점. 김선용 역. 서울: 감은사, 2018.

Sanders, E. P. 바울과 팔레스틴 유대교. 서울: 알맹e, 2018.

Wright, N. Thomas. 이것이 복음이다. 백지윤 역. 서울: IVP, 2017; 바울 논쟁. 최현만 역. 평택: 에클레시아북스, 2017;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최현만 역. 평택: 에클레시아북스, 2018.

김세윤. 칭의와 성화. 서울: 두란노서원, 2013; 바울 신학과 새 관점. 정옥배 역. 서울: 두란노, 2002.

김병훈. “‘바울신학의 새 관점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한 개혁신학의 비평.” lewishoh.tistory.com.

노승수. “‘바울의 새관점’ 학파가 주장하는 ‘미래의 칭의’에 대한 비판적 소고.” 기독교개혁신보, 2013. 9. 24.

노충헌. “‘이신칭의’ 소모적 논쟁, 언제까지 해야 하나.” 기독신문. 2016. 12. 13, 22쪽.

박동근. “‘새 관점 학파의 <율법주의 이해>’에 대한 비판.” 기독교개혁신보. 2013. 11. 9, 7쪽.

박영돈. “구원파의 거짓 구원론 반박.” 기독교개혁신보. 2014. 7. 12, 6쪽.

서철원. “개혁주의와 장로교회.” 기독신문. 2015. 4. 15, 18쪽.

서철원. “이신칭의 교리 500년 (1).” 리폼드 뉴스, 2018. 7. 25, 1-14쪽.

서철원. “이신칭의 교리 500년 (2).” 리폼드 뉴스, 2018. 8. 1, 1-10쪽.

서철원. “이신칭의 교리 500년 (3).” 리폼드 뉴스, 2018. 8. 9, 1-8쪽.

서철원. “이신칭의 교리 500년 (4).” 리폼드 뉴스, 2018. 8. 15, 1-6쪽.

이승구. “‘바울에 대한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 기독교개혁신보, 2013. 10. 26, 5쪽.

임태수. “구원의 조건이 ‘믿음’ 하나만이 아니고 ‘믿음과 행함’ 둘이다.” 들소리신문, 2015. 12. 23.

최덕성.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 reformanda.co.kr, 2015. 10. 21, 1-8쪽.

최덕성. “새 관점학파와 유대인 장학금.” reformanda.co.kr, 2016. 10. 19.

 


 

미주

1) Krister Stendahl(1921-2008). 스웨덴 신약학자. 스톡홀름 주교. 하버드대 교수.

2) E. P. Sanders(1937년 출생). 미국 뉴욕의 Union 신학교 졸업. 미국 듀크 대학교 교수. 은퇴. 감리교 출신.

3) James D. G. Dunn(1939년 출생). 영국 신약학자. 스코틀랜드 교회와 감리교회 본처목사(설교 평신도). 케임브리지대(Ph.D.). 덜함(Durham)대 교수.

4) N. Thomas Wright(1948년 출생). 영국 성공회 주교. 신약학자. 덜함(Durham) 주교 역임. 성 안드류 대 교수.

5) 영국 맨체스터대(Ph.D.). 풀러 신학교 신약학 교수.

6) 고려신대원 졸업. 아일립-덴버대(Ph.D.). 백석대 신약학 교수.

7) Fuller 신학교(M.Div.). Yale대 신학부(STM). King's College London (Ph.D.).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8) 하이델베르크대(Ph.D., Th.D.).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은퇴.

9) 독일 Bonn대학 졸업. 호서대 명예교수. 민중신학연구소 소장. 한국 구약학회장 역임. 제2종교개혁 연구소 소장.

10) 최덕성,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 reformanda.co.kr, 2015. 10. 21, 2-3쪽.

11) 최덕성, 위의 글, 2쪽.

12) 윤지숙, “바울의 새관점 논쟁 시작,” http://www.woolrimstory.net/news/articleView.html?idxno=229.

13) 서철원, “이신칭의 교리 500년 (3),” 리폼드 뉴스, 2018. 8. 9, 4쪽.

14) 서철원, 위의 글, 1-7쪽.

15) 최덕성, 앞에서 인용한 글, 1-4쪽.

16) 최덕성, 앞에서 인용한 글.

17) 노승수, “‘바울의 새관점’ 학파가 주장하는 ‘미래의 칭의’에 대한 비판적 소고,” 기독교개혁신보, 2013. 9. 24.

18) 이승구, “‘바울에 대한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 기독교개혁신보, 2013. 10. 26, 5쪽.

19) 최덕성, 앞에서 인용한 글.

20) 서철원, 앞에서 인용한 글, 1-8쪽.

21) 최덕성, 앞에서 인용한 글.

22) 최덕성, 위의 글.

23) 최덕성, 위의 글; 노충헌, “‘이신칭의’ 소모적 논쟁, 언제까지 해야 하나,” 기독신문, 2016. 12. 13, 22쪽.

24) 최덕성, 위의 글.

25) 이승구, “‘바울에 대한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 기독교개혁신보, 2013. 10. 26, 5쪽.

26) 서철원, “이신칭의 교리 500년 (3),” 리폼드 뉴스, 2018. 8. 9, 7-8쪽.

27) 노충헌, 앞에서 인용된 글.

28) 노충헌, 위의 글.

29) 노승수, 앞에 인용한 글.

30) 이승구, 앞에 인용한 글.

31) 김병훈, “‘바울신학의 새 관점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한 개혁신학의 비평,” lewishoh.tistory.com.

32) 최덕성, “새 관점학파와 유대인 장학금,” http://reformanda.co.kr/xe/index.php?document_srl=98428&mid=theoJournal&listStyle=viewer, 2016. 10. 19.

33) 서철원, “이신칭의 교리 500년 (2),” 리폼드 뉴스, 2018. 8. 1, 1-6쪽.

34) 서철원, 위의 글, 7-9쪽.

35) 서철원, “이신칭의 교리 500년 (1),” 리폼드 뉴스, 2018. 7. 25, 1-14쪽.

36) 최덕성. “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 유감.” reformanda.co.kr, 2015. 10. 21, 5쪽.

37) 최덕성, 위의 글, 6쪽.

38) 박영돈, “구원파의 거짓 구원론 반박,” 기독교개혁신보, 2014. 7. 12,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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