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은 자유·민주·인권·법치다
2024.02.29 10:33
우리의 소원은 자유·민주·인권·법치다
“통일 추진 기구 해산하라” 김정은 한마디에 남 통일 운동 세력 우왕좌왕
전쟁 對 평화 양자택일에 빠지면 우리에겐 출구가 없다
중요한 건 北 정권이 아니라 주민… 인도주의만이 감옥 문 여는 열쇠
[송재윤, "우리의 소원은 자유·민주·인권·법치다," 조선일보, 2024. 2. 20, A34쪽. 캐나다 맥매스터디 교수 .역사학]
북한이 “남조선”을 “대한민국”이라 부르는 정치 쇼를 벌이고 있다. “우리민족끼리”를 금과옥조로 여겨온 통일 지상주의자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들을 지배해 온 정치 행동의 강령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통일 추진 기구를 해산하란 김정은의 한마디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 본부는 와르르 무너졌다. 김씨 왕조에 끌려다니던 지난 정권의 핵심 인물들은 굳게 입을 닫고 있다.
북한이 남녘을 향해 쏘아 올린 반통일의 포탄이 남한의 통일 운동 세력을 궁지에 빠뜨렸다. 대한민국은 지금 왜 이런 부조리를 겪고 있는가? 그 원인은 같은 민족이란 이유만으로 무조건 “민족 통일”을 지상 목표라 부르짖어 온 맹목성에 있다. 대체 몇 십 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노래 불러 왔던가? 이젠 어떠한 가치를 실현하는 어떤 형태의 통일인지 다시 묻고 따질 때가 됐다.
헌법 제4조를 보면,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한다지만, 이때의 통일은 무조건적 통일이 아니라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이다. 이 원칙에 따르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핵으로 무장한 북한의 호전적인 전체주의 정권에 맞서서 평화적으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확장해야만 하는 커다란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입이 작은 유리병을 깨지 않고서 그 속에 들어앉아 발톱을 드러내고 눈알을 부라리는 흉포한 검독수리만을 산 채로 꺼내야 하는 상황이다. 냉전 시대 최후의 동서 문제와 민족 모순이 중첩된 세계사적 난제가 아닐 수 없다. 그토록 어려운 문제인 만큼 더 깊은 성찰과 더 창의적인 발상법이 필요하다.
고작 “그럼 전쟁하잔 말이냐?”며 전체주의 세습 왕조에 수억 달러 국민 혈세를 바치는 방법으론 병 속의 검독수리만 더 살찌우고 만다. “우리가 어디 남이냐?”는 낭만적 민족의식에 들떠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훼손하려 한다면 반헌법적 망동을 자초할 뿐이다. “전쟁이냐, 평화냐?”라는 양자택일의 함정에 빠지면 출구가 없다. 낡은 사고를 버리고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한반도의 꽉 막힌 수챗구멍을 뚫어버릴 쾌도난마의 묘책은 진정 없는가?
그런 묘책은 당장 안 떠오를지라도 누구나 정도(正道)는 알고 있다. 바로 김씨 왕조가 자행하는 잔혹한 인권유린과 악랄한 정치 범죄에 희생당해 온 북한의 인민에게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알려주고, 인권과 법치의 희망을 전해주는 일이다.
지난해 나는 서울에서 2006년 탈북한 도명학 작가를 만났다. ‘조선작가동맹’ 소속 시인으로 활약하다가 정치범이 되어 3년간 투옥되었던 그는 탈북 후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집 “잔혹한 선물”은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역작이 아닐까. 그는 말했다.
“휴전선 너머 북녘 땅의 동포들은 고저 거대한 감옥에 딱 갇혀있는 포로들이야요! 감옥 안에서는 절대로 바깥에 걸린 자물쇠를 부술 수가 없는 거디요. 밖에 있는 사람들이 고저 문밖에 걸린 자물쇠를 열어줘야죠. 그래야만 포로들이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올 수가 있는 거디요, 고럼!”
핵 무장에 성공한 이상 김씨 왕조는 앞으로도 대한민국을 향한 비대칭적 군사 도발의 수위를 높여갈 것이다. 호전적인 북한 정권에 대해서 지난 20여 년 대한민국 정부는 감상적 민족주의와 투항적 평화주의 이외엔 아무 대책도 없이 핵 개발의 시간만 벌어주고 말았다. 무엇보다 북한 주민이 겪고 있는 정치적 핍박과 인권유린에 대해선 비판의 목소리도, 실질적 해결책도 내놓지 못했다.
북한 주민의 수난을 외면하고선 한반도 문제를 풀 수가 없다. 독재 정권과의 대화도 필요하지만, 북한 주민을 위한 인민 중심의 대북 정책이 더 시급하다. 민족주의는 독재 정권에 악용될 수 있다. 인도주의만이 감옥 문을 여는 열쇠다. 북한 정권이 아니라 직접 북한 주민을 향해 목소리 높여 자유·민주·인권·법치를 외칠 때다. 도명학 작가의 말대로 감옥의 자물쇠는 문 바깥에 채워져 있다. 밖에서 그 자물쇠를 깨줘야만 포로들이 문을 부수고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더는 북한 정권에만 목매지 말고, 자유민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액션 플랜을 짜서 북한 주민에게 알려야 한다. 남북한이 함께 “우리의 소원은 자유·민주·인권·법치”라고 외칠 때, 오직 그때에만 “통일이여, 어서 오라” 노래할 수 있다.